[세상은 넓고 할일은 없다] 김화영의 시베리아 열차 횡단기 (3)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4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객실은 단순한 교통기관이 아니라 이동하는 호텔이요 집, 요컨대 생활 공간이다. 우선 객차 첫 방의 승무원에게 간단한 요금을 내고 시트와 베개 커버와 수건을 지급 받는다. 그의 방문 앞에는 사모와르에서 뜨거운 물이 끓고 있다. 이 물로 타 마시는 차이(茶)는 이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운치. 복도 옆으로 늘어선 1등실은 마주보는 침대가 하나씩. 이 방 전체가 우리 둘의 차지다.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가 묘령의 여인이면 어떨까?

소설은 대개 이렇게 설정된다. 커튼이 쳐진 창가의 테이블 위에는 갓이 씌워진 등. 반짝이는 니켈 옷걸이. 벽에 달린 그물 망 주머니. 매트리스에 시트를 깔고 덮고 베개를 정돈한 다음 출입문을 잠근다. 선로 쪽 탁자 위의 작은 램프에 불이 켜지는 저녁. 창밖에는 사그라지는 저녁 빛. 나타났다 사라지는 강. 숲. 기차의 느린 진행이 흐린 풍경을 오래 내다보게 한다. 새벽 3시. 선잠에서 깨니 어떤 역에서인가 기차가 오래 선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움직인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몇 살쯤인가?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작은 침실은 밖에서 포효하며 달려드는 스텝지방의 검은 유령들로부터 달리는 속도에 의하여 보호받으며 사치스런 환영과 더불어 유폐의 세계로 변한다. 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 "말을 타고 저의 텐트를 향하여 스텝을 달리는 유목민의 눈에 창마다 발그레한 등불을 달고 꿈인양 달아나는 기차의 작은 방들은 어떤 감정을 자아냈을까? 아마도 그는 거기서 사회주의가 예비하는 사회의 황금시대, 바로 그 행복의 이미지를 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 그 신기루는 사라졌다. 나는 그 신기루가 사라진 자리에 자본주의의 배낭을 짊어지고 들어와 앉은 것이다.

6월 27일 금요일, 오전 여덟시 하바로프스크 도착.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러시아 속담에 40도가 안 되면 술이 아니고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며 4백km가 안 되는 거리는 거리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한다. 12시간의 기차여행은 지척의 나들이에 불과하다. 수리 중인 역사는 지저분하다. 물 뿌린 이른 아침의 통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렬. 역에 도착하는 즉시 다음 행선지의 표를 사야 한다. 무지의 동분서주, 손짓 발짓 끝에 울란 우데행 차표를 손에 넣다. '룩스'칸은 없다. 대신 4인용 '쿠페'(2등.사진) 한칸을 다 주겠단다. 2박 3일 54시간을 달려야 하는 긴 행로다. 1인당 1백50달러가 넘는 비싼 기차비.

택시를 타고 예약된 '드라콘'호텔로 간다. 교외인 듯한 숲길. 어쩐지 '드라콘'(龍)이 꿈틀대는 호텔 이름이 수상타 했더니 허름한 중국인 호텔이다. 호텔보다는 나이트 클럽이 주업인 듯한 인상. 우범지대에 온 것은 아닐까? 이미 국영 여행사에서 요금과 예약 커미션 5%를 선불하고 바우처까지 받아왔는데 수부의 중국 여자가 레저베이션 피(예약대금)로 호텔요금의 25%를 내란다. 말이 안 통하니 영어 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바꿔준다. 그게 법이란다. 영수증까지 주는 것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듯.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방은 여인숙 수준. 인도나 중국의 교외 같은 먼지. 황량함.

간신히 지나가는 헌차를 세워 흥정하여 인투리스트 호텔로 간다. 스탈린 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거대한 건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가라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소개받은 고려인 출신 호텔 지배인 이상훈씨를 찾는다. 키 작고 얌전해 보이는 한국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다, 다음 도시의 호텔을 예약하고 싶다, 이 도시에 대해서도 안내받고 싶다 등을 설명. 그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대뜸 엘리베이터에 태운다. 여직원들이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어떤 사무실로 안내. 그는 한국어를 못하는 고려인, 그래서 영어를 하는 여직원 사무실에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은 것이다. 여직원이 묻는다. "왓 두 유 원트?" 그렇다 그게 문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여행자들이다. 간신히 "내일 아침 7시에 역으로 갈 수 있도록 택시를 호텔로 불러 주시오"라고 러시아말로 종이에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울란 우데의 호텔 이름 하나를 적어 받는다. 우리가 묵는 드라콘 호텔 이름을 대니 처음 듣는단다. 요컨대 우리는 변두리 동네의 기막힌 싸구려 호텔에 비싸게 든 것이다. 걸어서 시내로 나온다. 말끔한 대로. 크고 아름다운 교회. 새로 단장한 듯 베이지 색과 흰색과 투명한 하늘색 지붕이 아름답다. 무슨 임관식이 끝난 듯 젊은 군인들과 성장한 가족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중이다. 러시아 젊은 여인들의 각선미는 세계 제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배가 고프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한 건물들 늘어선 대로를 끝없이 걷는다. 전차를 타고 오리엔탈 마케트로 간다.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시장 길의 미로를 누빈다. 크고 뜨끈뜨끈한 호떡. 속에 고기가 들었다. 버스 스톱 벤치에 처량하게 몸을 부리고 앉아 맥주와 함께 그 튀김만두로 점심을 때운다. 녹초가 되어 다시 인투리스트 호텔로 돌아와 사우나 부킹을 하고 기다린 끝에 에어컨이 들어오는 넓은 방으로 안내된다.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니 살 것 같다. 호텔 아래 아무르강가로 나간다. 포장 집에서 재향군인 친목회 모임 같은 중년 사내들 옆 테이블에 앉아 연하고 맛있는 돼지고기 꼬치 바비큐와 맥주로 포식하며 강을 내다본다. 강 건너는 중국이란다. 지난날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 극동소련군 지도자 김유천 거리와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조각을 찾아가 보고 싶지만 너무 피곤하다. 호텔로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임영균 교수는 우범지대 같은 호텔, 잠기지 않는 출입문이 안심되지 않아 밤새 잠을 설쳤단다.

이른 새벽 불려온 택시로 역을 향하다. 웬 팔등신 미녀가 호텔에서 나오더니 합승을 하잔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허연 다리가 뿌연 새벽의 신기루 같다. 역에 도착해 우리의 승강장을 못 찾아 우왕좌왕. 러시아 도처에서 파는 직사각형의 한국제 '도시락' 라면을 사들고 객차에 오른다. 뚤뚤 말아놓은 객실의 매트리스. 후진 시설. 사모와르의 뜨거운 물을 부어 남은 김치와 함께 먹으니 개운해진다. 바다 같은 아무르 강이 지나가고 곧 바다. 침대 4개의 방을 둘이 차지하니 좋지만 쾌적함이 '룩스'에 못 미치고 화장실이 불결하다. 수도꼭지를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알고 보니 꼭지 밑에 달린 쇠막대를 위로 힘껏 쳐들어야 물이 나온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이 한쪽 손으로 쇠막대를 받쳐들고 세면대에 물을 가두는 골프 공.

식당칸으로 가서 보드카를 마신다. 창가의 조화 꽃 장식이 러시아 식으로 사치스럽다. 기차가 선다. 홈에 내려서 행상들에게 만두.오이.토마토.닭다리 구이 등을 산다. 이것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여행의 운치다. 식당의 직원들도 여기서 장보기를 한다. 기막힌 풍경이 벌어진 것은 다시 식당차로 돌아와서다.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