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히말라야 탐사 #11신] 히말라야의 동쪽 캉리갈포산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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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도로로 인해 취재진은 우측의 능선을 따라 미투이 빙하로 들어섰다. 사진=신준식

‘빙하는 무수한 거대 백룡(白龍)들이 고산 심곡을 헤엄쳐 돌아다니는 듯 보이고, 처녀림과 빙하 그리고 예리한 봉우리들의 콘트라스트는 감동적인 한 폭의 그림 같다.’
중국식 표현으로 캉리갈포(崗日嘎布)산군을 표현한 것이다.

3월31일(현지시간) 탐사대가 티베트 동부의 기점도시인 보미(波密, 2735m)를 벗어나자 아열대의 깊은 수림은 마치 흑림(黑林)을 방불케 한다. 모든 산은 빼곡히 산을 휘감은 수림으로 둘러싸인 특이한 지형이다.

캉리갈포산군의 위치는 히말라야의 최동단에 위치한 남체바르와(南迦巴瓦峰, 7782m 또는 7756m), 얄룽창포(雅魯藏布)대협곡의 북동단에서 시작해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전장 280km의 산맥이다. 얄룽창포가 더 이상 서쪽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인도로 급선회를 하는 것도 다 이 캉리갈포산군에 막혔기 때문이다. 라사에서 직선거리로는 약 400km 동쪽에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유럽 알프스에 버금가는 수많은 아열대수림과 중국에서 표고차가 가장 낮은 지역까지 빙하가 발달되어있다. 이 산군의 아타(阿打)빙하는 산군의 최고봉인 바이가라 봉(Bairiga 또는 Ruoni, 6682m)의 북동면에서 시작해 해발 2400m까지 내려온다. 또 해발 6000m 넘는 봉우리 30개, 5000m 이상의 봉우리는 셀 수 없이 많다.

또 이 지역은 수목한계선 위로 바로 설선이 시작되는 지형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서구의 등반가들과 탐험가들은 이 산군을 '티베트의 알프스'라 불러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애칭(愛稱)이지 산군을 구분하는 용어로는 부적합하다. 일본의 탐험가 나까무라 타모츠(Nakamura Tamotsu)는 ‘Alps of Tibet' 이라는 용어를 그의 저서 부제목으로 사용했다. 또 그는 ‘Alps of Tibet’이란 용어가 역사성과 당위성이 있다는 느낌을 본문에서 내비치다. ‘Alps of Tibet’이란 용어가 고유명사로 굳어지기를 바라는 투다. 또 그는 영국의 모험적 식물학자 킹돈워드(Kingdon-Ward)가 이 지역을 시노 히말라야(Sino Himalaya)로 불렀다며 산맥의 명칭에 대한 역사성도 언급한다.

보미로 향하는 중간 들른 곰파에는 큰 행사가 있었다. 많은 티베티안들이 기도를 위해 곰파를 찾았다. 사진=스즈키 히로코

하지만 필자의 의견은 고유산줄기에 대한 명칭은 단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의 노력과 지식으로 산맥 또는 산군의 이름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오랜 기간 캉리갈포산군은 이미 현지인들에 의해 고유의 이름을 불려왔다. 이를 존중해야한다.

우리는 이곳 캉리갈포산군에서 핵심적인 두 곳의 빙하 탐사에 나서기로 했다. 가장 많은 6000m급 봉우리가 몰려있는 미투이(米堆)빙하와 라구(来古)빙하의 탐사였다. 먼저 미투이빙하로 향했다. 티베트운전사는 미투이빙하 조금 못미처 친구가 일하는 병원에 잠시 들르고 싶다며 차를 작은 마을로 몰았다.

"형! 내 것도 더 마시세요."
"아니야 벌써 두 컵 째야."

티베트 운전사 친구인 의사의 부인이 따라주는 티베트 전통차인 수유차(버터차)는 정말 마시기 곤혹스러웠다. 마실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마시고나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설사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그들의 성의를 무시하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수유차를 더 마시기를 권하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됐다. 이곳 오지의 병원에는 많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병의 종류도 다양했다. 척박한 생활에서 오는 위생문제에서 비롯된 병부터 기름진 음식에서 오는 성인병이 많았다. 높은 고도와 강한 자외선도 이들을 빨리 늙게 했다. 잠시지만 티베트인들의 힘든 오지에서의 생활과 그들의 아픔을 생각하게 되었다.

쫒기는 일정 때문에 안주인의 점심준비를 정중히 사양하고 우리는 서둘러 길을 나섰다. 캉리갈포산군과 함께 흐르는 파룽창포강(帕隆藏布江)을 따라 이어진 길은 티베트와 쓰촨(四川)성을 연결하는 도로인 촨장공루상의 작은 마을인 미투이(3800m) 마을로 들어서려했다. 하지만 이곳은 도로공사 중이었다. 우리와 같은 시간에 이곳을 방문한 중국지리학회(中國地理學會)의 차량들도 이곳에 들어서지 못하고 다시 차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6450m. 제모송구의 전경. 마치 부채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다. 사진=신준식

하지만 우리는 꼭 산을 보아야했다. 티베트 꼬마가 인도하는 우측 능선에 올라 미투이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해발고도는 다시 거의 4000m을 기록한다. 미투이빙하 정면으로 이 빙하의 최고봉인 제모송구(Gemosongu, 6450m)북서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까지 미등의 산으로 남아있다. 그 옆으로 하모콩가(Hamo Kongga, 6260m)가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주위 산군의 사진은 모두 찍은 터라 산 하나쯤은 포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저 앞으로 가녀린 히로코가 멀리서 보기에도 아주 힘들게 능선을 올라서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이러면 안 되지.’
‘언제 또 여기 오겠어. 최선을 다하자.’
이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힘을 내 능선에 올라섰다.

티베트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곰파로 향하는 티베트 아낙네들. 사진=스즈키 히로코

거의 파죽음이 된 몰골로 능선을 한참 올라서자 하모콩가의 북서벽이 우리를 반겼다.
막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것은 성취감을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가 가진 마음속의 지도의 공백이 메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걷지 않으면 사진은 없다.’는 교훈을 다시 가슴에 세기며 히로코에게 말을 건넨다.

“같이 걸었으면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왜 먼저 갔어요?”
“그게.. 더 쉬었으면 능선에 못 올라갈 것 같아서요. 제가 걸음이 느려서..”
말끝을 흐렸지만 그 의미는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번 탐사의 성공을 위해 그녀가 보여준 노력은 나의 힘이 되었다는 걸.
신준식씨를 찾았다. 그는 벌써 다른 능선에 올라 제모송구와 특이한 구조의 티베트 가옥 촬영에 열중이다.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테크놀로지가 현시대를 장악해버린 지금 원시적인 방법으로 탐사를 이어가는 우리의 지저분한 손과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작은 행복감이 피어나는 건 아마도 대자연 그리고 캉리갈포산군이 우리에게 전하는 큰 선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친다. 미투이빙하 탐사를 마치고 우리는 미투이빙하의 동쪽의 마을인 라워(然烏, 3850m)로 차를 몰았다. 캉리갈포의 마지막 탐사지 이자 중국 지형에서 특이한 지형인 남북 종단의 헝단(橫斷)산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글=임성묵(월간 사람과산) 사진=신준식, 스즈키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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