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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정동길 옆 미술관 초현실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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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자가 되면 나쁜 일도 많고 좋은 일도 많다. 나쁜 일이란 아무래도 욕을 더 얻어먹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요, 일상생활이 공연히 바빠지는 것이다. 좋은 일이란 사실 별로 없지만 가끔 대접받게 되는 일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지나가다 무슨 전시회 같은 것이 있을 때, 일상적 루틴 속에서는 무딘 감각으로 지나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기자랍시고 애써 비비고 들어가 볼 오기가 생겨나게 된다. 혹시 기사거리라도 생길랑가? 그러다 보면 큐레이터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장황한 설명을 해 주고 칙사대접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래서 사회를 배우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더 섬세한 감각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버스에 붙어 있는 선전포스터에 말쑥한 중절모 쓴 신사아저씨의 대문짝만 한 얼굴 위로 담뱃대가 붕 떠 있는 그림! 그따위에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았지만 왠지 교양이 뒤처진다는 콤플렉스는 저 의식의 한 구석에 또아리 틀고 있었다. 신세계백화점을 수리할 때 그 공사장 가리개에 그려진 그림, 수없는 신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고 있는 그림 '골콘다'의 작가의 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차일피일 미루고만 살았다.

"나는 의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을 혐오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을 좋아한다." 초현실주의자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 구라를 피울 줄 안다면 분명 불건강한 사람은 아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현실을 초월하는 공상이 아니다. 현실을 환치시키거나 도치시키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우리에게 낯섦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낯설다는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오히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나는 고대 또는 현대미술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그의 그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상징성을 부과하는 것은 좀 예의에 어긋난 것이다. "나의 회화에는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이란 전통에 매우 충실한 생각들일 뿐이다."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만화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그의 나무그림 '올마이어의 성'의 테마를 발전시킨 것이라 한다.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꿈을 꾸면서 가졌던 것과 유사한 자유를 실재의 삶에서도 요구한다."

그는 누구인가? 벨기에에서 동학의 2세교조 해월선생이 돌아가신 해에 태어나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미술세계를 구축한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 1898~1967)! 우리는 모든 현대미술 사조의 확실한 한 원조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놀란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위대한 전시장소였다. 난 솔직히 덕수궁 옆 정동길, 옛 대법원을 개조한 건물에 시립미술관이 새로 자리잡았다는 것도 몰랐다. 뉴욕의 모마(현대미술관)를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따스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위대한 전시관이었고, 전시내용도 모마 못지않게 충실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요번 주말로 마그리트의 전시가 마감된다. 15일 전까지 100만 명이라도 우리 시민이 꼭 봐야 할 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린애일수록 마그리트의 그림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 그는 피카소를 비판하고 있었다.

도올 김용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