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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CIA, 이런 거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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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할리우드 첩보액션물에 거의 예외 없이,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최첨단 디지털장비, 탁월한 요원, 전 세계를 무대로 놀라운 작전을 벌인다. 한마디로 무소불위다. 배우로 이름난 로버트 드니로가 메가폰을 잡은 '굿 셰퍼드'는 그와 사뭇 다른 CIA영화다. 그 조직의 초창기, 더 거슬러 올라가 전사(前史)를 그려낸다. 미리 밝혀두자면, '본 아이덴티티' 같은 액션스릴러와 거리가 멀다. 성경에서 인용한 '선한 목자'라는 제목에는 반어적 뉘앙스가 있다. 주인공은 신념과 의지로 이 길을 선택했다고 믿지만,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본 모습은 그 믿음대로가 아니다.

영화의 시작은 1961년.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세력을 좌초시키기 위해 CIA는 비밀작전을 준비한다. 나중에 '피그만 침공'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사전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베테랑 요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은 내부 첩자를 색출하는 책임을 맡는다. 정체불명의 비디오가 배달되고, 여기 담긴 단서에 하나씩 접근하는 동안 윌슨의 과거가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30년대 말, 윌슨은 예일대의 문학도였다. 집안 좋고 두뇌 명석한 그는 명문가 자제들에게 내려오는 비밀 동아리 '스컬 앤 본즈'에 가입한다. 부시 대통령 부자를 비롯해 최고권력층을 다수 배출한 막강 동아리다. 조국의 은밀한 부름을 받자 그는 기꺼이 응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영국을 무대로 윌슨은 훗날 CIA의 전신이 되는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영화 속의 과거가 현재와 가까워질수록 윌슨이 선택한 길은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그러나 좀처럼 표정을 읽기 힘든 괴물처럼 그려진다. 누구도 믿지 말라던 선배의 조언은 어느덧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아내와 아들은 윌슨의 비밀주의에 진저리를 치고,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으로 드러난다. 한두 번이 아니라 일상이다.

드니로가 감독을 맡은 건 '브롱크스 이야기'(1993) 이후 두 번째. 오래 매만진 작품답게 얘기가 많다. 재미 위주로 요리하자면 엇갈린 사랑이든, 비극적인 가족사든, 배신으로 점철된 첩보전이든 선택과 집중으로 극적인 각색을 했을 터다. 드니로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정공법으로 말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상영시간은 장장 2시간47분.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첩보전의 역사만큼 길다. 어떤 이는 객석에서 몸을 뒤틀겠지만, 무모하다고 헐뜯기만은 어렵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전직 CIA 요원의 도움을 받아 유장한 세월을 재현하는 이 영화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이 고전적 첩보원들은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지령을 내릴 때도 양반식 품위를 찾고, 시와 음악이 고문과 암호만큼 익숙하다.

적군과 아군이 고루 능력을 인정하는 첩보원 윌슨이 '범생이' 사무직처럼 그려지는 것도 인상적이다. 두꺼운 뿔테안경에 서류가방을 들고 육중한 회색건물로 출퇴근하는 모습에선 반역도, 일탈도 상상하기 어렵다. 가혹한 개인적 비극이 벌어지고 업무상 뼈아픈 일도 겪지만, 이 길에 삼켜진 그의 행로가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첩보원의 인생이 지루하다니, 통념과는 달라도 이 영화에서는 리얼리티다.

아날로그 시대임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CIA의 정보분석력은 놀랍다. 비디오에 등장하는 건축물의 양식, 배경에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기종 같은 것을 차례로 분석해 문제의 장소를 좁혀간다. 배우 겸 감독의 명성은 앤절리나 졸리.앨릭 볼드윈.윌리엄 허트.빌리 크루덥.마이클 갬본 등 화려한 조연에서 드러난다. 드니로 자신도 출연했다. '대부' 시리즈의 감독 코폴라가 총괄제작자다. 청소년 관람불가. 19일 개봉.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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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사건이 매듭지어진 뒤다. 윌슨은 도입부와 거의 비슷한, 사무직원 같은 모습으로 출근한다. 저만치서 마주친 새 상사가 말한다. "전에 한 의원이 묻더군. 왜 CIA를 칭할 때 정관사(the)를 안 붙이냐고. 난 되물었지. 신(God) 앞에 정관사를 붙이냐고." 그 무소불위의 조직 속으로 윌슨 역시 소리 없이 삼켜지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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