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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상의 풍류 부채 속에 되살려"|전주 합죽선 이기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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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날에는 우리와 가까운 생활도구이자 신분표시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요즘은 선풍기나 에어컨에 밀려 겨우 장식용으로 명맥을 유지하게된 부채. 사라져 가는 우리 선인들의 풍류와 멋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전주시 대성동의 민속공예단지다.
부채·목공·완초 등 10여 가구에 이르는 이 단지에서 맨 처음 명장에 오른 이기동씨(62)는 17세 때부터 기능을 익히기 시작해 45년간을 부채와 함께 살아온 전주 합죽선의 산증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채와 함께 지낸 시간이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합죽선 제작은 3백번 이상 손길이 가는 까다로운 작업의 연속이지요.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부채의 매력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아요. 젊을 때는 그저 정열로 일을 했지만 이젠 선인들의 삶을 음미하면서 부채를 만듭니다.』
전남장성에서 농사꾼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이씨는 17세 때 전주에 왔다가 친구의 권유를 받고 합죽선 제작업체에 근무하면서 기능 수업을 시작했다.
합죽선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된 그는 도제 과정을 밟아 3년 뒤 「영진공예」라는 간판을 내걸고 독립, 반백년 가까이 전주시내 인후동·서학동·진북동·남고동 등지에서 오로지 부채제작을 계속해왔다. 『나일론부채가 나오고 선풍기·에어컨이 보급되면서 개당 2만∼10만원을 호가하는 합죽선제조업은 한때 사양길에 접어들었었죠.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어요. 생활이 나아지면서 기계에 싫증을 느끼게된 사람들이 합죽선을 많이 찾고 있지요. 5∼6년전부터는 물건이 모자라 못 팔정도예요.』
요즘엔 수요가 한해 3만∼3만5천개에 이르고 있으나 국내 총 생산량은 2만개를 밑돈다는 것. 숙련공이 드물고 일손이 달려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다.
합죽선이 수출가능성이 높은 등 전망은 밝지만 국산대나무와 전승되는 비법만으로 생산되는 세공이면서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의 연속이기 때문에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이씨는 걱정했다.
『합죽선이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지요. 전라남북도 경진대회 장려상을 시작으로 전국본선에서 특상을 수상하자 지역에서도 인정해주더군요. 그전까지는 집안에서부터 따돌림받았고 심지어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어요.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느냐는 것이지요. 해마다 2천개 이상씩 평생 10만개를 만드는 동안 엄지손가락의 지문마저 사라졌습니다.』
이씨는 전승공예부문에서만 20여차례, 총 수상경력은 무려 30차례가 넘는 화려한 경력자가 됐다. 생활도 안정이 됐고 합죽선 기능자로는 최고의 영예인 명장에도 올랐다.
합죽선은 구례·하동·진주 등지에서 나는 대나무를 길이28∼29cm로 자르는 작업부터 시작해 초조·정련·낙주 등 7단계3백 공정을 거치는 철저한 수공예품이다. 숙련공 5명이 종일 매달려야 10∼12개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씨는 두 아들 신립씨(33)와 남립씨(28)에게 기술전수를 끝냈고 맏사위 한경치씨(39)는 도제수업을 마쳐 분점을 내게 했다.
비록 손끝은 문드러졌어도 전승의 길을 터놓은 것이 다행스럽다는 이씨는 자신이 만드는 합죽선이 국민적 사랑을 받고 영원히 간직될 만큼 뛰어난 명품으로 꼽히길 희망했다.【전주=배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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