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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할때만 “개방몸짓”(본사 김진국기자 3박4일 평양취재기: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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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외국 손님들 보이는 곳만 “변화”/“우리식”강조속 내부결속 강화
북한은 변화하고 있는가.
이 의문은 평양에 체류한 나흘동안 내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방북에 앞서 본 보도들은 북한 음악에도 정치색이 배제되고 서양식 리듬이 도입되는가 하면,경제특구를 설정하고,일본·미국 등에 경제협력을 얻기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북한의 개방은 흉내를 자랑하는 것일뿐이지 결코 외부에서 생각하는 개방은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외부의 개방요구를 회피하고,국내에는 마치 개방정책을 취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하는 「북한식 개방」인 것이다.
21일 개성으로 오는 열차속에서 북측기자는 일본의 록그룹공연을 어떻게 소화시킬 수 있느냐고 묻자 『억지로 웃는 얼굴로 보는 것이지. 그게 외교 아니오』라고 말했다. 북한의 변화는 이런 필요에서 출발하고 있다.
평양에 도착한 18일 저녁 북한이 탈정치성 악단으로 자랑하는 왕재산경음악단의 공연을 봤다. 만찬겸 공연장인 대란관은 외부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도록 인민문화궁전앞 골목길속 미로와도 같은 문을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왕재산악단의 음악과 무용은 인형춤(로봇춤)·브레이크댄스 등을 포함,서양의 일반적인 공연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동작이 단순하고 감정이 싸늘하게 절제되거나 억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은 외국에 북한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북한 자체의 입장전환 때문인지 이번 방북기간동안 북측 사람들은 지난 2,4차때와는 달리 「변화」「개방」이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개방 시늉이 외국의 경제지원을 기대한 몸짓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개방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84년에 합영법을 채택한 이후 개방을 계속 추진해왔으나 미국·일본등 주변나라들이 북조선을 고립시켰을뿐이지요.』
그러나 평양에 주재하는 외국특파원들은 『북조선에는 중국식의 경제특구를 만들 기반도 마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이 일부 텔리비전회사 등을 합영회사로 설립했으나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조총련계라는 것이다. 북한의 합작요청에도 외면하는 외국을 유혹해보겠다는 허울만의 「합영」인 셈이다.
평양시내에 새로 등장한 네온사인도 이런 개방시늉의 일종이다.
4차회담때까지만 해도 저녁 8시면 희미한 가로등외에는 온통 깜깜했다던 시내건물에 「남새상점」「리발관」「종로 물고기상점」「구두수리점」등 띄엄 띄엄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게를 밤늦게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자본주의사회처럼 선전해야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거리를 장식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안내원도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때문인지 네온사인 관리나 전기료부담도 해당가게가 아니라 구역인민위원회가 한다는 설명이다.
전기사정이 어려우면서도 「변화」를 보여주고 싶은 북한당국의 심정이 어설픈 네온사인이 된 것 같다.
한 안내원은 평양시내의 중앙난방식 주택 실내 난방온도가 과거 24도에서 창광거리등에 아파트를 새로 많이 지으면서 18도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최근 경화결제 추세가 이어지고,러시아로부터의 원유공급이 중단되면서 에너지원이 부족해진 탓으로 이해됐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부터 소련에 대해 올해부터 중국과 경화결제를 하고 있고 일부 예외만 인정될 뿐이라고 한 외국인기자는 말했다. 한 북한안내원도 원유부족이 북한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자립식인 북한경제가 대외의존적인 남한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선전은 잊지 않았다.
21일 평양을 떠나 개성으로 오는 기차에서도 한 북측 기자는 개성∼평양간 고속도로가 시멘트로 포장되고 있는 이유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최근 시행한 생활비(월급)인상도 관심거리였다.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북한경제라지만 일시에 「전체노동자·기술자·사무원」의 급여를 43.4%나 올리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 보장연금은 평균 50.7%,벼·강냉이 수매가격은 각기 25.2%와 44.8% 올렸다.
북측 안내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동안 많이 올리지 않아 이번에 올리는 것』이라고도 말했으나,김씨부자의 생일과 연결시키면 『그동안에도 올려왔다』고 말하는등 오락가락했다.
로동신문의 리길성 부국장은 『국가예산중 경공업부문에 대한 비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갑자기 커진 구매력에 상응하는 물건이 제공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사회주의나라에 사는 나도 이해가 안 갑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실제 지급된 뒤에 봐야겠습니다.』
한 외국인 기자도 아무런 해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 의문은 오히려 엉뚱한데서 해결됐다. 쌀이 배급되고 기본 소비재가 값싸게 제공되면 생활비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한 시민은 『절반은 저금하지요. 애가 대학에 가서 옷을 짓는다든지 하면 씁니다』라고 말했다. 한 안내원은 『우리도 옷을 사고 밥도 많이 먹을 수 있어도 검소한 품성이 몸에 배어 있다』고 말해 일반소비까지 공산주의 도덕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했다.
더구나 북한은 일상생활까지 통제받는 치밀한 조직사회여서 돈이 있어도 쓸곳이 없을 것같다는 인상이 그들의 설명에 짙게 배어있었다.
내부의 체제강화와 경제적인 필요에 의한 개방의 필요성이 북한에서는 한창 논쟁거리가 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북측 사람들의 설명이다.
지난 1월3일 동구의 교훈을 지적하고 사상무장을 강조하는 김정일 비서의 담화도 『내부단속을 강조하는 것』일뿐 경제적인 개방 필요에 대한 결론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 평양에 있는 외국인 기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남사이의 이질성을 없애자고 하던데 같은 민족인데 이질성이 어디있습니까』남쪽 사람이나 외국인관광객들이 동화속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북한을 보고 있는 것조차 못느끼고 있는 것이다.
외국을 자주 여행한다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빠져 있는 우상화의 집단 최면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돼 있는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개방」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한갖 시늉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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