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미래주의를 입는다 … '반짝이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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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광효의 밝은 회색 수트. 은은한 반짝임이 특징이다.

올가을, 남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왔다.

상상 속 미래의 '추남(秋男)'은 2007~2008 가을.겨울 서울 컬렉션(3월 28일~4월 5일 서울 대치동 세텍)에서 현실로 재연됐다.

48개의 브랜드(디자이너)가 참여한 이번 행사에서 디자이너 대부분은 올 패션계의 가장 뜨거운 주제인 '미래주의'를 주목했다.

각자 개성 넘치는 방식으로 미래주의를 풀어냈다.

서울 컬렉션 현장에서 살펴본'가을 남자'의 모습을 전한다.

#디자이너, 미래를 변주하다

미래주의를 향한 디자이너들의 '방점'은 각기 달랐다. 장광효가 주로 '반짝이는' 옷으로 미래를 표현했다면, 송혜명은 금속성 소재의 목걸이.체인 액세서리로 앞날을 예감했다. 반짝임의 강도도 달랐다. 김규식이 옷 자체의 광택감을 강조한 것에 비해 장광효는 옷이 빛을 받아 잔잔하게 반짝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한결 편안해진 실루엣이다. 남성복까지 불었던 스키니 열풍에 억눌렸던 신체를 이제는 덜 구속하겠다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이런 모습은 바지에서 두드러졌다. 송자인.송혜명은 엉덩이에서 무릎 위까지는 헐렁하고, 그 아래는 몸에 착 달라붙는 스타일의 팬츠를 내놓았다. 올 2월, 파리.밀라노 등 해외 컬렉션에서 돋보였던 붉은색과 푸른색 계열이 서울 컬렉션에서도 포인트 컬러로 사용됐다.

20대 초반 남성의 일상을 다룬 송혜명의 캐주얼(上). 정돈된 수트와 전투복 느낌의 외투를 조합한 김규식의 작품(左). 위쪽은 넓고 아래쪽은 좁은 송자인의 팬츠(下).

#감각적인 미래

장광효는 '감성적 미래'를 펼쳐보였다. 패션쇼 제목도 '50, 퓨처리즘'. 그의 올해 나이가 50이다. '인간 장광효'의 인생이 절반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또 강렬한 미래주의가 100이라면 자신의 퓨처리즘은 그 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첫 무대를 은은하게 반짝이는 밝은 회색 수트로 열어젖혔다.

미래주의의 대표적 상징은 우주시대와 별을 주제로 한 반짝임. 하지만 장광효는 "본래 작품에 반짝이는 소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깔끔한 정장을 선보여 왔던 내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미래주의라는 대세와 함께 호흡하는 방법으로 은은한 반짝임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검정 수트에도 잔잔하게 반짝이는 구두를 어울리게 했다.

#현재와 미래

'도미닉스 웨이'를 만드는 송혜명은 "트렌드가 미래주의라고 하지만 소재.소품이 그러할 뿐 기본은 자연주의"라고 말했다. 그의 브랜드에 등장하는 '도미닉'은 디자이너의 상상 속 인물. 전설적인 록그룹 롤링스톤스의 멤버였던 믹 재거가 모델이라고 한다. 송혜명은 도미닉의 일상을 주제로 삼아 한 소년이 청년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영국의 거리패션에서 영감을 얻은 팬츠는 무릎 위쪽은 편안하고, 정강이 아래로는 스키니 비슷한 형태였다. 그가 'Y룩'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그는 재킷의 안감이나 겉감, 머플러에는 자연주의를 대변하는 표범.얼룩말 무늬를 심어넣었다. 송자인의 남성복도 착용감이 편한 'Y룩' 팬츠가 눈에 띄었다. 옷과 몸의 기능이 역전된, 즉 몸을 속박하는 의상에서 확실히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디자인이었다.

#암울한 미래

김규식은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암울하게 전망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로봇과의 전쟁'. 암울한 미래세계인 '디스토피아'를 형상화했다. 그는 패션쇼 무대 역시 로봇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로 꾸며냈다. 그리고 전투복을 연상시키는 외투를 주로 내놓았다. 전반적으로 강해 보이는 작품 이미지와 달리 소재는 편안한 면으로 짠 게 도드라졌다. 그는 "연약해 보이는 모델까지 로봇과의 일상적인 전쟁에 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레이닝복에 쓰일 법한 면 소재의 팬츠와 길이가 긴 니트류 역시 전투복 느낌의 외투와 묘한 어울림을 빚어냈다.

강승민 기자
사진=김병국 사진작가

◆미래주의=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화운동이다. 기계문명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옹호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전설적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드레스에 해와 달을 큼지막하게 새겨넣으며 광활한 우주를 표현해냈다. 패션계의 미래주의는 69년 미국인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반짝이는 별빛과 금속 질감의 '은빛'이 패션에 속속 접목됐다. 에나멜.새틴(광택사).금속성 소재 등이 애용된다. 80년대 미국의 경제성장.우주계획과 함께 성행했던 미래주의는 최근 패션계의 주요 트렌드로 떠오른 '80년대 돌아보기'의 하나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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