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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세에도 정정하게 약국을 경영〃장수비결은 무리 않는 생활〃|감기 약 할아버지 남원 최극재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1백6세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약국을 경영하는 전북 남원 천우당 매약포 주인 최극재옹(남원시 쌍교동 225).
그는 오늘도 5평 남짓한 가게에 앉아 감기 약·소화제 등 각종 약을 찾는 손님들을 맞는다.
구부정한 허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채 백발이 성성해 꽤 나이든 모습이기는 하지만 최 옹을 1백세가 넘은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찾아온 손님에게 일일이 증세를 묻고 진열장에서 약을 꺼내 봉지에 싸주며 또렷 한 목소리로 복용 법을 알려주는걸 보면 70대쯤으로 보기 십상이다.
74년 동안 남원에서만 약국을 운영하며 보통사람으로 살아온 최옹은「감기 약 할아버지」 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그가 짓는 감기약은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에선 무슨 영약이라도 먹었느냐며 무병장수의 비결을 털어놓으라고 합니다만「인명은 재천」이란 말이 있듯 매사에 순리를 따르며 무리하지 않아 이렇게 오래 사는가 봅니다.』
장수비결을 묻는 질문에 최옹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것 외에 아무런 처방은 없다고 한마디로 말한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집에서 5백m떨어진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한 뒤 돌아와 아침을 먹고 나면 약국에 손님이 들기 시작, 밤9시까지 일한다.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입맛도 항상 좋고 잔병도 없어 늙을 일이 없다는 것.
『흔히들 육식이 건강에 해롭다고 하지만 과식만 안 하면 몸에 좋다고 봅니다.』
최옹은 고기·채소·생선류를 비롯, 한식·일식·중국식·양식 등을 가리지 않지만 포만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만 먹는 소식을 꼭 지킨다고 했다.
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식사하면서 같은 반찬을 연거푸 입에 대지 않는 것, 22세 때부터 줄 곧 점심을 걸러온 습성이다.
특별히 건강관리를 위해 보약을 들거나 운동한 일도 없고 힘이 센 장사도 아니며 단지 한창 때 키가 1m80㎝에 이르러「장대」라고 불렸다. 두 귀가 유달리 커 밑으로 처졌으며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고 술은 포도주·맥주 등 독하지 않은 것으로 한잔 가량 마시는 게 예나 지금이나 그의 주량이다.
이같이 절제 있는 생활 덕분에 최옹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등 자질구레한 병치레가 없었다. 30세 되던 해 대중 목욕탕에서 옻이 옮아 2개월 가량 약 신세를 졌고 79세 때 남원의료원에서 담석제거수술을 받았으며 95세 때 전주예수병원에서 백내장수술을 받은 것이 그의 병력의 전부다.
최옹은 선친을 비롯, 선대 대부분이 60세를 전후로 일생을 마쳤고 특히 어머니는 자신을 낳자마자 병이 생겨 석 달만에 세상을 뗘나는 등 단명한 편이었다. 집안 가운데 1백세 가까이 장수한 사람은 84년에 1백세를 갓 넘기고 돌아가신 두 살 손위 누님이다.
그는 요즘 사람들의 요란한 건강유지 법에 대해『일부에선 정력에 좋다며 사슴피를 마시고 뱀탕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무분별한 낭비풍조가 판치고있으나 이는 절제를 잃은 방탕생활로 무병장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최옹은 배움이라곤 9세 때부터 10년 동안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익히고 소학을 뗀 것이 고작이다.
구한말인 1886년 11월25일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빈농에서 2남1여중 막내로 태어난 최옹은 2세 되던 해 장사를 하기 위해 가사를 정리한 선친을 따라 친지들이 모여 살던 남원시 동충동으로 이사했다.
선친은 전남 여수를 오가며 포목행상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최옹을 남원 용정 서당에 보내 글을 깨치도록 했으나 가세가 기울자 10년만에 글공부를 포기, 농사 등 막 일판에 나서 돈을 벌어 집안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후 기독교에 입문, 독실한 신자가 돼 선교활동을 하던 22세 때 선친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평소 효도를 못한 때문이라며 깊이 뉘우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점심을 굶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28세 때 이웃소개를 통해 당시 16세이던 부인 추씨와 결혼 슬하에 4남7여를 두었으나 부인과는 30년만에 사별했고 자녀들 가운데도 장남을 비롯, 3남3여가 6·25때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현재 자손은 서울에 살고있는 4남 학권씨(50·체신공무원), 장녀 학순씨(70·전주), 2녀 학례씨(62·남원), 3녀 학희씨(58·서울), 4녀 학인씨(55·전주)에다 친손자·손녀 8명, 외손자·손녀 13명, 친증손자·손녀 12명, 외증손자·손녀 13명 등 모두 51명이다.
최옹이 약국을 경영하게된 계기는 32세 되던 해 선교 일로 평양에 갔다가 도심에 있던 일 신당이라는 약방에 각종 양약이 진열돼 있는 것을 처음보고 남원에 이 같은 약을 취급하는 약포를 열기로 작정, 당시 남원경찰서로부터 매약 허가를 얻어 동충동 집에 가게를 차린 것이다. 1926년 봄에는 미국 싱거 미싱사 한국대리점 남원분점 관리인으로 취직, 집을 현 위치로 옮겨 약포·분점을 동시에 운영했으나 10년만에 분점을 정리하고 매약 일에만 전념해왔다.
최옹은『일본인들은「음식은 중국이 제일이고, 집은 일본식이 가장 깨끗하며, 의복은 한복이 검소하다」며 입버릇처럼 말했으나 일본인들이 물러간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옛말이 하나도 안 맞는 것 같다』며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어 힘겨운 때가 많다고 했다. 【남원=현석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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