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으로 토속적 정감 살려낸 한국의 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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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안 그려지고 무척 힘들었던 어느 날, 성산대교 교각을 세우는 데 갔었습니다. 머리카락처럼 새까만 물이 흐르는 그곳을 내려다보았죠. 뛰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꼬옥 끌어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고희를 맞은 원로작가 류병엽(70)씨는 "그런 시련과 고비를 넘겼기에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 산천의 작가'로 불리는 류병엽씨가 4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부속 두가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했다. 전시엔 100~500호에 이르는 대작 40여 점이 나왔다. 500호라 하면 가로 3.3m, 세로 2.5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다. 그는 "17년간 공개하지 않고 보관해 왔던 큰 그림들"이라며 "갤러리 현대가 넓은 전시공간을 모두 내주는 덕분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은 월출산.내장산.인왕산.한라산 등 전국의 산을 중심으로 마을과 절 등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지난 20년간 정말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산이 친구가 돼 주었죠. 내 그림 속에는 산이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혼자서 떠난 여행의 결과물입니다. 고독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욕즉강(無慾卽强)이라 할까요, 결국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의 작품 기법은 서양화지만 그 안에는 따스한 토속적 정감과 전통적인 미감이 담겨있다. "류병엽 그림은 서양화가 아니라 동양화"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작가는 "내 그림 속에서 보이는 선과 색채는 한국적"이라며 "고찰의 단청이나 서까래의 색을 보면서 '저 속에 내 그림이 있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어린 내게 늘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할머니 얼굴, 구불구불한 전북 순창의 논두렁길, 하늘과 맞닿은 고궁의 기와선, 오래된 소나무 등 한국의 푸근한 정취를 원천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불교성과 명상의 맥락에서 보시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화면을 수십 개의 면으로 분할해 원색을 그대로 채워 넣는다. 그의 그림에는 명암이 없다. "명암으로 볼륨을 넣는 것은 하지 않죠. 본 바탕이 중요합니다. 공간감과 원근감은 스며들어 있습니다. 질감도 두툼해 오전과 오후, 어떤 햇빛에 보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죠."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색면을 통해 끊임없는 평면의식을 노출하고, 형태를 통해 회화가 이미지의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류병엽의 그림은 분명 구상회화지만 또 다른 독자적 세계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22일까지 02-734-6111.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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