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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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60년 동안 중요한 운동정기현장에는 빠짐없이 나타나 무려 1천5백 편의 기록영화와3백만 장의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화와 사진에 미쳐 평생을 바친 그는『남은 것이 미아처럼 흩어져있는 필름들과 서울 신당동의 집 한 칸뿐이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
『내가 좋아 신명이 나서 뛰어다녔고, 그렇게 해온 일이 자료로서,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으니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각종 단체행사 등을 촬영해주고 받는 사례가 그의 주 수입원이지만 체육행사만은 필름을 팔게 되든 아니든 일단 현장으로 달려간다.
경기장 입구에서 그의 얼굴은 무료입장권이며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경기는 권위가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가 됐다.
이 같은 기록들을 가지고 회갑이 되던 지난 74년이래 모두5차례의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1주일간 열린 사진전에는 2백50여 점의 사진 외에도 젊은 시절 전 재산을 털어 만들었던16㎜가 기록영화와 35㎜필름들도 함께 공개됐고 1만5천여 명이 다녀갔다.
인생을 총정리 하는 기분으로 열었다는 이번 사진전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으로 그는 지난51년 광주에서 열린 제32회 전국체육대회를 꼽는다.
전쟁으로 생사를 모른 채 뿔뿔이 흩어졌다가 군복에 초라한 운동화차림으로 다시 만나게 된 각지방 선수들이『살아있었구나』하며 얼싸안고 우는 장면이다.
이외에도 64년 동경 올림픽에서 신념단부녀의 눈물어린 상봉, 머리를 짧게 깎은 농구의 김영기, 코트를 떠나는 박신자 등 어린 선수가 스타로 자라 은퇴하기까지의 모습들을 포함, 해방이후 지금까지 우리체육계가 치러온 4천여 회의 크고 작은 경기 거의 모두가 그의 필름에 담겨있다.
전국 체육대회는 거의 참가했으며 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등 해외출장도 5차례나 나가 우리 선수들 출전 종목은 모두 촬영했다.
『집안이 어려웠어요.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며 124세 때부터 용산에 있던 제과점 종업원으로 일했지요.』
뭔가 기술을 배워 남에게 눌리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3년 동안 용돈을 모아 일제 파레타 사진기 중고품을 하나 샀다.
암실 대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현상을 해가며 익힌 사진기술로 이웃학교 졸업식 사진 등을 찍어주며 수입을 올렸다.
20세 되던 34년에는 8㎜중고 무비카메라를 한대 샀고 이때 처음 찍은 작품이 철도국과 체신국 간의 연식 야구경기였다.
스포츠 사진과 영화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36년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를 본 다음부터다.
당시 용산 야구단의 유격수로 뛰던 장씨는 선수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옮길 수 있다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며칠 후 16㎜ 무비카메라를 장만한 다음부터는 주요 경기가 열릴 때마다 촬영기사로 나섰다.
38년께 전국 체육대회에 연식야구와 육상 부문에서 경성대표선수로 출전할 정도로 운동에 취미가 있었던 그에게는 안성맞춤의 직업이었다.
그사이 그가 차린 빵집은 날로 번창했고 해방 직전에는 물러가던 일인으로부터 충무로에 있는 백화점까지 사들여 상당한 재산가가 됐다.
경제적 부담을 벗어버린 그는47년10월 최초의 스포츠 기록영화인『조선올림픽과 성화』를 제작해 전국의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돌며 상영했다.
다음에 만든 영화가 한국의 건아(49년), 영관의 제전(53년), 승리의 제전(54년), 평화의 기수(65년), 세계를 누르고(67년), 승리의 자취(73년)등이었다.
영화가 완성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벽에 광목 스크린을 걸고 시사회를 가졌다. 거실이 현상 실이자 편집실, 시사회장이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탓인지 부인 허희옥씨(63)와 사이의 2남2녀 중 서라벌대 사진학과를 나온 장녀 봉식씨(40)는 잡지사 사진기자고 건대 축산과를 나온 장남 해룡씨(36)는 민자당 전속 사진사가 됐다.
그러나 스포츠 영화에 미쳐있는 동안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6·25전쟁으로 백화점이 불타버린 뒤에도 집이 두 채, 가게가 하나 남아있었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영화 제작비와 필름 값으로 보였다.
집과 가게를 모두 처분하고 셋방살이로 나앉은 그에게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보관할 곳이 없어 처마 밑에 쌓아둔 필름이 비에 젖어 못쓰게 된 일이었다.
『팔다리가 갈려 나가는 것처럼 쓰라린 심정이었다』는 회고담이다. 76년 가을에는 보증금 25만원에 월세 3만원 짜리 사글세방의 방세가 밀려 길거리로 쫓겨나게 됐다.
영화제작관계로 이미 수백 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데다 당장 갈 곳도 없는 궁지에 몰린 그에게 뜻밖에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다.
영화촬영관계로 알고 지내던 한 독지가가 선뜻 6백만 원이란 거금을 아무 조건 없이 빌려준 것이다.
이때 작은 드럼통 6백 개에 들어있던 8t트럭 한대 분의 귀중한 영화필름을 담보로 맡긴 뒤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있다.
그는 요즘도 임대한 무비카메라 한대와 미놀타 카메라를 메고 스포츠 현장을 누비고 있다. 아는 스포츠 관계자들의 주문을 받아 만드는 단편 기록영화나 경기장면 사진 앨범제작 등이 그의 생계수단인 셈이다.
그의 소원은 자신의 필름 도서관을 경기장 옆에 하나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찍은 필름의 길이는 모두 1만㎞쯤 되겠지만 채 정리가 안돼 못쓰게되고 6·25때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이제 쏠만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1천㎞분량쯤 될 것이란다.
『집 지하실, 친척과 친구 집, 서울운동장 기록실 등에 분산보관하고 있는 영화와 사진 필름들을 모아 정리하고 일반에게 전시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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