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평야 … ㈜ 호남평야 … 기업농 키워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프로 전업농 15만 가구 키우겠다.'

19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농업 경쟁력 강화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42조원의 세금을 쏟아 부어 농촌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 전업농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었다. 농림부는 안달이 났다. 고육책으로 면마다 1명씩 지정하던 전업농을 10명씩 뽑아 올리라고 각 자치단체를 닦달했다.

전업농이 갑자기 늘자 논값이 뛰었다. 논을 사려고 하자 농협이 저리 자금을 빌려줬다. 농기계도 앞다퉈 새로 장만했다. 100만원짜리 농기계를 사면 50만원은 정부에서 대줬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96, 97년엔 30억원 정도가 들어간다는 최첨단 유리온실이 동네마다 생겼다. 정부가 저리로 시설자금의 80%를 빌려줬기 때문이다. 축산농가도 신바람이 났다. 소를 키우겠다는 농가에 정부가 공짜나 다름없는 융자금을 퍼줬다. 그러나 전업농의 꿈은 잠시였다. 너도 나도 소를 키우는 통에 98년 소값 파동이 불어닥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논값도 떨어졌다. 98년까지 퍼부은 42조원은 어디 가고 농가에 남은 건 빚더미뿐이었다. 98년 이후 정부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농가 부채의 뿌리는 여기서 비롯됐다.

UR 협상에 이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때도 정부 대책은 이와 비슷했다. 한.미 FTA가 타결되자 농림부는 서둘러 보완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대책의 내용은 과거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수석연구원은 "경쟁력 강화 등 근본적인 대책 없이 '퍼주기 식' 지원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래선 10년 후 한국 농촌의 모습은 암울하다. 이젠 농업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 퍼주기로 끝난 농업 대책=YS정부의 농정은 천문학적인 농가부채만 남기고 실패했지만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세농은 농사를 접게 하는 대신 기업농을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15만 프로 전업농 육성론'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농정의 방향은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때마침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한파로 농가경제가 파탄 직전에 몰리자 우선 농가를 살리는 게 급해졌기 때문이다. 기업농 육성 정책은 뒤로 밀리고 소농 보호 정책이 농정의 중심이 됐다. DJ정부는 농촌 기반정리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마을마다 농지 정리와 농로 확장 공사가 벌어졌다. 산골짜기 논까지 바둑판처럼 정리를 했다. 이 사업은 애초 농기계를 사용해 농사를 짓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자치단체 단위로 할당이 떨어지자 효율성은 뒷전이었다. 농촌마을로서도 정부가 돈 대서 길을 내주고 농지를 정리해 준다는 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1997~2000년 벌어진 산촌종합개발사업은 전형적 사례다. 산촌을 개발한답시고 산림문화회관과 마을 도서관을 지어줬다. 그러나 몇 년 못 가 건물은 폐가가 되거나 창고로 쓰였다. 이렇게 DJ정부가 '농업.농촌 발전계획'에 쓸어넣은 돈은 45조원,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2003년 한.칠레 FTA 비준안이 국회에 올라가자 농민단체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영에 가서 '제사 시위'를 벌이겠다고 나섰다. 전국에선 연일 FTA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그해 말 현 정부는 과거 정부보다 한 술 더 떠 119조원의 '농업.농촌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YS정부는 농가별로, DJ정부는 마을 단위로 지원했다면 노무현 정부는 여러 개 마을을 묶어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한.미 FTA가 타결되자 박홍수 농림부 장관은 "119조원보다 더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농정의 방향 바꿔야=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자면 농업도 기업화가 불가피하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국토가 좁기 때문에 농업은 무조건 안 된다는 비관론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가구당 경지면적을 늘려 특화하면 한국 농업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경자유전'이란 낡은 틀을 깨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용규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0~20년 앞을 내다보고 주식회사 호남평야나 주식회사 김해평야와 같은 거대 기업농을 키워야 한국 농업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정경민.김준현.윤창희 기자

*** FTA 지식검색 : 계절관세

1년 중 특정한 계절에 한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제도다. 시장 개방으로 관세가 없어질 때 생산자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종의 완충장치다. 어떤 농산물이 수확기를 맞으면 높은 수입 관세를 부과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비수확기엔 수입 관세를 매기지 않아 가격 오름세를 막기 위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