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돈줄 거머쥔 금융 가의 "왕중왕"|외풍심해 단명한 게 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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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 건 한은 총재임기가 3월25일로 다가오면서 여기저기서 총재자리를 향해 뛰는「소리」 가 들린다.
중앙은행총재. 금융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보되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곳이라고들 하는 자리다.
한나라의 통화신용정책과 전반적인 경제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탁월한 식견과 경륜을 구비한 원로가 맡는 것으로 알려진 중앙은행총재는 적어도 미국·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웬만한 장관보다도 훨씬 높은 권위와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실제로 미국사람들은 대통령 다음으로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장을 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앙은행의 권위는 정부기관이면서도 정부정책에 대해 따가운 충고와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로부터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은행총재에 대해 특히 소신이 강조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시중 돈의 양을 조절, 통화가치를 지켜 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정권이나 돈줄을 죄는 인기 없는 긴축정책을 싫어하게 마련인데 중앙은행은 기관의 설립목적이 통화가치의 안정인지라 양측은 의견일치를 볼 때보다는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가 더 많다. 집권당은 인기관리와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돈을 가능한 한 많이 찍어내고 싶어하는 반면 중앙은행은 언제나 물가걱정을 앞세우며「곤란하다」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다.
자리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자연「바람」을 많이 타게 되고 그 결과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일제하 조선은행을 전신으로 하여 50년 6월12일에 설립된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두 16명의 총재가 거쳐갔지만 그중 4년 임기를 제대로 마친 사람은 김유택(2대), 김세연(9대), 김성환(11대)씨 등 3명에 불과하다. 17대 현 김 건 총재가 임기만료일(오는 3월25일)을 두 달도 채 남겨 놓고 있지 않아 이 대열에 낄 경우 임기만료총재는 4명이 된다.
또 한은 총재의 평균 재임기간이 2년 반도 안 된다는 사실은 과거 정부가 중앙은행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미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실 총재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만큼 임명권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이 단지 중앙은행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나머지 정부정책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에 의한 것이라면 정부의 신뢰를 오히려 떨어뜨리게 된다.
한은과 정부(좀더 구체적으로 재무부)가 통화정책을 포함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견대립을 보여 온 것은 42년 한은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조선은행 마지막 총재로 한은 초대총재가 된 고 구용서 씨로부터 현 김 건 총재에 이르기까지 재무부와 크고 작은 의견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양측의 입장대립이 지상에 오르내리며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은 지난 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은 법 개 정을 둘러싸고 재무부와 한 은이 첫 충돌을 벌인 것이다. 당시 인태식 재무부장관이 은행감독 부(현 은행감독원)를 재무부로 이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은 법개정을 추진하자 김유택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장관의 법개정방향은 연구부족이거나 경솔한 행동』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 문제로 4년 임기를 마치고 중임 중이던 김 총재는『한은 법개정은 국가의 주축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애초부터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이를 반대했습니다』라는 이임사를 남기고 한 은을 떠나야 했다.
재임 1백일도 채우지 못해 최 단명을 기록한 4대 배의환 총재도『앞으로 은행이 정치자금을 대출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 단속할 것이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총재직을 물러날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6대 유창순 총재는 증권파동에 중앙은행을 동원하는 당시 군사정부처사에 반발하다가 자리를 물러났다. 62년 대규모 증시부정사건이 터지면서 증권거래소가 결제불능사태에 빠지자 정부는 한 은에 자금공급을 지시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처음에 당시 돈으로 20억 환을 지원했으나 정부가 다시 30억 환 지원을 지시하자 유 총재는 투기과열로 빚어진 증시사태에 중앙은행이 더 이상의 뒷돈을 대주기는 곤란하다고 맞섰다.
이 시기에 한은 법이 개 정돼 재무부가 사실상의 한은 감독관청으로 올라앉게 되면서 한은 은「재무부의 남대문출장소」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 총재의 뒤를 이은 7대 민병도 총재도 정부와 충돌을 빚고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첫해에 총재직을 맡은 민씨는 외환사정악화에 남다른 우려를 가졌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날로 늘어가던 외채에 대해 정부에 충고를 해 오던 그는 정부가 경제성도 없는 어선구입을 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면서 한 은에 지급보증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스스로 사표를 썼다.
11대 고 김성환 총재는 남덕우 재무장관과「돈독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총재 중 유일하게 2기를 연임, 최 장수 기록을 가질 수 있었다. 남 장관은 국민대를 졸업한 후 한 은에 들어갔으나 소위 일류대 출신의 엘리트행원들 사이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는데 이때 유독 김성환씨가 후배인 그를 잘 감싸줬고, 이것이 인연이 돼 남씨가 장관이 되어 당시 은행감독원장이던 김씨를 총재로 끌어 주었다는 것이 한은 내부의「구전」이다. 두 사람은 보기 드물게 통화정책의「긴축운용」에 대해서도 의기투합하는 면이 많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 장관이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로 자리를 옮기고 김용환 재무장관이 취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김 장관은 일을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인 반면 김 총재는 신중한 온건파여서 두 사람은 의견충돌이 잦았다. 쌓여만 가던 양측의 불화는 은행감독원을 한 은에서 분리하려는 또 한번의 한은 법개정을 둘러싸고 절정에 달했다. 재무장관과 반목이 심했던 김 총재가 두 번째 임기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한은 출신이었던 당시 김정렴 청와대비서실장과 남부총리가 뒤에서 받쳐 주었던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에도 한은 독립이란 대 명제를 놓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은 이어졌다. 12대 신병현 총재는 80년 당시 소위 신 군부세력 등을 상대로 한 은을 헌법 기관화해야 한다는 메모를 자신이 직접 작성, 전달하기도 했다.
15대 최창락 총재는 85년 창립35주년 기념식을 통해『중앙은행의 자주성과 책임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전제, 『한은 독립성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법제상의 보완작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독립과 대립은 다른 것이며, 독립이라면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지부터를 명확히 규정하고 시작하자」는 뜻이었으나, 문제가 워낙 미묘한지라 그의 뜻을 펴지는 못했다.
89년 금융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은 법개정 논란 때 김 건 총재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한 은의 독립성이 강화되도록 관계 요로에 한은 입장을 전달했다.
역대 총재들 가운데 한은 맨의 전형으로 꼽히는 사람이 신병현 총재다. 그의 성향은 그가 한은 내 핵심부서인 조사부장을 하다 미 워싱턴에서 연수중일 때 5·16군사혁명이 나자 현지 교포들과 어울려 반대시위를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귀국이 금지됐으나 조사부장 때 차장으로 같이 일했던 김정렴씨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그를 청와대 경제담당특보로 불러 주면서「해금」이 됐다.
7대 민 총재도 가부가 분명했으며 최창락씨도 재임시절 고지식할 정도로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은 현 김 건 총재도 예외는 아니다.
「과묵한」대부분의 총재와는 달리 매우 적극적인 타입으로는 16대 박성상 총재가 꼽힌다. 똑똑한 사람은 다 모였다는 한 은에서 상고출신으론 그가 유일하게 총재자리에 올랐다. 인사체계를 다소 일 그러 놓았다는 얘기도 듣지만 그는 제조업, 그 중에서도 소재부품산업과 기계공업분야를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금융정책에 많이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은 과는 총재시절에만 인연을 맺었던 13대 김준성씨는 5공 출범 때 총재를 맡아「실세」로 통하면서 역대 총재와는 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한 은은 과거에 비해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정부가 금융정책을 둘러싸고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할 때 왜 한은 총재는 침묵을 지키느냐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이 최선의 대응책이라고 할만큼 총재자리 지키기가 어렵다.
한은 사람들은 금융자율화라는 큰 흐름이 이미 시작된 만큼 앞으로 정부의 금융간섭주의는 가능한 한 지양돼야 하며 한 은도 스스로 중립성확보에 힘을 모아 가야 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심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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