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黨시대' 제 식구 쥐어짜 살림꾸리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불법 대선자금 수사 정국이 장기화하면서 정치자금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정치자금의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로 뒤바뀌었다.

열린우리당이 대표적이다. 이 당 소속 의원들은 지난 10월 창당준비위원회에 2천만원씩을 내야 했다. 당 지도부가 아예 의원들 이름으로 국회 농협지점에서 1인당 2천만원을 대출받은 것이다. 이렇게 마련한 8억여원으로 살림을 꾸리고 있다. 갹출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은 당 운영비조로 의원들에게서 1천만원씩을, 당 중앙위원들에게서 5백만원씩을 추가로 거두고 있다. 박양수 조직총괄단장은 "요즘 분위기에 어디서 후원회 하기도 어려워졌다"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지난달 28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시 최명헌 당 선관위원장의 서울 잠실 집을 은행에 저당잡혔다. 이렇게 마련한 급전으로 대회를 치렀다. 이후 민주당은 최고위원에게서 5백만원 이상, 위원장급 당직자에게서 2백만원 이상, 당무위원에게서 1백만원 이상씩을 거둔 데다 후보들이 낸 1인당 6천만원의 기탁금으로 崔의원의 빚을 해결했다.

바짝 말라버린 돈줄 때문에 웃지 못할 현상도 생기고 있다. 지난달 사무총장을 맡았던 민주당 장재식 상임중앙위원은 자신이 마련한 돈 4억원으로 당 사무처 직원들의 11월분 월급을 지불했다. 張위원은 대신 당 경리국이 '나중에 갚겠다'고 한 차용증서를 받았다. 뒤 이어 사무총장을 맡은 강운태 의원은 8일 "기업도 구조조정을 하려면 오너들이 사재를 내놓는다. 우선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는 자구책을 먼저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뾰족한 수가 없는 姜총장 역시 소속 의원들에게서 돈을 더 거두겠다는 의미다. 이렇다 보니 연말연시에다 내년 총선이라는 정치자금의 수요를 앞두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아우성이다.

후원회를 계획했다가 정치개혁 바람에 밀려 취소한 수도권의 한 의원은 "한마디로 빈사상태"라며 "쓸 곳은 많은데 중앙당은 보태주기는커녕 뜯어갈 궁리만 하고 있다"고 했다.

여론의 눈총을 무릅쓰고 후원회를 여는 용감한 의원들도 있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달 후원회를 연 야당 중진의원의 경우 경비 등을 제하고 남은 돈이 1천여만원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의원회관에 퍼져 있다. 최근 후원회를 연 한 의원은 "후원금이 예년의 40%에도 못 미친다"고 토로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정치개혁안과 관련해 1백만원 이상일 경우 명단을 공개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지난해 거액을 냈던 기부자들이 90만원 또는 99만원을 내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자업자득치곤 너무 가혹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승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