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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살인자 독백에 끄덕끄덕? 당신의 마음도 공범 될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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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야간여행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312쪽, 들녘, 9000원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 패스(반사회 인격장애)'.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사고체계가 잘못된 탓에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가까운 예로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있다.

하긴, 양심이 있다면 애초에 연쇄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 무명 작가 마크 크라머도 일종의 사이코 패스다. 그는 출판사 사장이자 먼 친척인 야콥 뢰더를 살해한다. 2년간 공들여 쓴 소설이 형편없다면서, 은퇴한 영화배우 프라이킨의 자서전이나 쓰도록 주선했다는 이유에서다. 어쩌면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는 자서전을 쓰겠다며 프라이킨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완전범죄를 계획한다. 늙은 프라이킨의 젊은 아내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꼭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 자신도 왜 그들을 죽였는지 자문한다.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답은 '나도 모르겠어'다. '뢰더는 나를 부당하게 대했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사라를 사랑하고, 프라이킨은 걸림돌이었다.' '상황이 나를 지배했다.' '둘 다 늙었잖아.'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어긋나게 맞춰둔 퍼즐 조각처럼 버석거린다.

살인 후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면서 슬퍼하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고, 살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그의 시선은 지독히 차갑다. 죽은 출판사 사장이 실은 그에게 거액의 유산을 물려줬고, 소설도 출간하도록 손 써놨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의 양심은 절반만 반응한다. '후회와 고통의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절반의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절반은 슬픔, 나머지 절반은 웃음으로 채워버리는 잔혹한 살인자. 사람 목숨은 쉬 앗으면서도, 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덧 살인자의 시선에 동화되어 버린다. 살인 증거물을 뒤늦게 폐기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아슬아슬한 안도감을 느끼는 독자의 정신상태는 과연 정상일까. 비단 소설이 살인자 '나(크라머)'의 시점으로 서술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공범의식에 빠져든다.

프라이킨의 죽음을 애도하다가도 그 집 대문을 벗어나는 순간 수다를 떨며 까르르 웃는 이웃들은, 사람을 죽인 뒤 웃어젖히는 크라머의 모습과 닮아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이라고, 평범한 독자들이라고 '사이코 패스'일 확률이 0%라 장담할 수 있을까.

소설은 범인의 시각에서 살의를 품게 되는 심리부터 계획.실행.수사 단계까지 서술하는 '도서 추리'물이다. 독일의 신예 작가가 2001년 발표한 첫 작품. 여느 추리물처럼 예측하는 재미를 느끼기엔 모자란 부분이 있지만, 살인의 심리나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사유하기엔 충분히 깊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더디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작품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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