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일제시대냐”(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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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16일 오전 11시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야자와 일본총리가 웃으며 성남 서울공항 트랩을 밟던 그 순간 이곳에서는 일왕 허수아비 화형식이 조심스레 준비되고 있었던 것.
『담요를 그쪽으로 더 당겨. 머리가 보이질 않아.』
『피킷 몇개 더 가져와. 다리를 가리게.』
일본에 대한 피해배상 및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폭 1m짜리 플래카드로 휘감겨진 팔각정속에서는 털모자와 두루마기차림의 할아버지 몇분이 낮은 목소리와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어제 대사관앞에서 태평양 전쟁희생자유족회가 만든 허수아비는 시작도 하기 전에 경찰이 달려들어 그냥 뺏어갔다지. 우리도 조심….』
두꺼운 파카차림의 사복 경찰관 2명이 슬금슬금 다가오자 노인들은 입을 닫고 딴전을 했다.
오전 11시20분이 되자 10여개 항일단체소속회원 2백여명이 공원정문앞에 늘어 선채 「일총리 방한 규탄대회」를 시작했다.
『…일왕은 태평양침략전쟁을 즉각 사죄하라.』
구호가 끝나자마자 「명인」이라는 일왕이름이 쓰여진 높이 2m짜리 흰색 허수아비가 순식간에 대열앞으로 내세워졌으며 곧이어 석유를 가득 머금은 허수아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 기습 화형식에 당황한 경찰은 급히 허수아비의 불길을 잡는 한편,피킷 등을 휘두르며 이를 항의하는 시위대열을 방패로 거칠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너희들은 어느나라 국민이냐. 지금이 일제시대냐.』
그러나 경찰에 의해 정문앞까지 떠밀린 시위대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해산해야했다.
마침 쏟아지는 흰눈속에 파묻혀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손병희 선생의 동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했다.<정형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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