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양 교육' 이 무너지는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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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최근 우리 대학에서는 '교양 교육'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외환 위기가 일어났던 10년 전부터 정부가 대학의 교육을 공급자보다 수요자 중심으로 바꿔 놓은 정책을 시행하면서 대부분의 학생이 취업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목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과 인간적인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인문학은 대학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위기에 놓여 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학은 사회와 관련없는 학문만을 연구하는 수도자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사회와 인류를 위한 문명의 창조적인 산실이기 때문에 중세와 달리 사회와 동떨어진 상아탑으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은 눈에 보이는 사회의 기능적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내일의 사회 구성원들이 될 학생들을 성숙한 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지식을 제공하는 정신 교육의 장이다. 지금처럼 대학이 대학의 정신이자 뿌리이며 인간의식과 인간 가치를 위한 필수적인 학문인 인문학을 추방한다면,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적인 등불을 상실하게 됨은 물론 미래를 여는 순수한 진실과 비전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교양 교육에 중심을 둔 인문학은 비록 산업사회에 필요한 톱니바퀴 같은 인간형을 양성하지 못해 가시적인 부를 가져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민들의 성숙한 인격 형성을 위한 지적 재산은 물론 사회문화 창조를 위한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가 된다. 대학의 고유 자산이자 특징인 교양 교육은 '노예적 움직임'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적이고 이성적이며 명상적인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대학이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글을 쓴 헨리 뉴먼에 따르면 지식의 모든 가지는 서로 함께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인문학은 과학과 다른 실용적인 학문의 추구와 이해에도 도움을 준다. 가령 케플러는 플라톤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한 다섯 개의 규칙적인 입체에 대한 가설을 바탕으로 태양계의 운행 법칙을 발견했고, 원자탄의 아버지인 오펜하이머 또한 물리학자가 되기 이전에 고전문학자였다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인문학의 중심이 되고 있는 문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가 문학작품 속에서 새로운 인식론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발견함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된 사회적인 감정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현실에 대한 협력적인 담론을 펼치기 위한 지성을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대학이 확고한 교육철학에 대한 신념을 잃고 미성숙한 피교육자인 학생들의 성급한 요구 조건만을 좇아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찾고 학문 상호 간에 균형을 잃어버리는 교육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면, 대학은 그 빛을 잃고 사설 학원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정신적 표상인 상아탑의 의미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 사회는 심각한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최근 미국 하버드대가 인문학을 포함한 기타 8개 분야를 교양 필수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버드대가 방대한 독서량을 요구하는 교양 필수 과목을 이렇게 많이 설정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수토록 한 것은 대학 교육이 결코 취업 준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정부와 대학,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실용 학문만을 권장하거나 투자하고 교양에 필요한 인문학을 고사(枯死)시키는 사회 환경을 계속 허용한다면 단기간 동안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는 스스로 묘혈(墓穴)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행위다.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