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독일패권주의」 견제 나섰다/유고사태서 드러난 미­독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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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크로아티아등 승인에 미서 불쾌감 표시/영도 함께 거들고 불마저 간접적 비난
독일이 통일뒤 점차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대한 미국·영국 등의 견제가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등의 견제에 대해 독일은 동서냉전체제의 붕괴와 구소련의 해체 등으로 「악역」을 맡을 상대를 상실한 미국이 새로운 「악역」으로독일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앞으로 미·독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독일 통일당시 국제사회는 통일을 냉전체제붕괴의 구체적 상징으로 이해하고 거대 독일에 대한 우려는 소수의견에 그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등은 독일이 지난해 12월23일 유고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두공화국을 공식 승인한 것과 독일연방은행이 이자율을 인상한 것을 계기로 독일에 대한 견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대한 외교적 승인에 반대해온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독일이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고 일방적으로 승인한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며 외교적으로 거의 금기되다시피한 용어를 동원,불쾌감을 표시했으며 부시 대통령의 한 자문위원은 『파렴치한 짓』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와 함께 미국의 언론들도 『독일로부터 일격을 당했다』며 미국정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해 12월초 마스트리히트 유럽공동체(EC) 정상회담이후 『이는 독일의 외교적 대승리』라는 헬무트 콜 독일총리의 언급에 대해 『그동안 스포츠분야이외에서 승리라는 말대신 성공이란 말을 써온 독일이 이로써 1945년이후 최초의 승리를 공표한 것』이라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국제외교무대에서 미국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영국의 반응은 더욱 신경질적이다.
선데이 텔리그라프지의 페리그라인 워스돈같은 언론인은 『콜총리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발언의 외교적 파장을 의식,『도덕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결정을 집요하게 추진하는 면에서 그렇다』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독일측은 이를 더할 나위없는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권위를 자랑하는 파이낸셜 타임스지의 칼럼니스트 존 월먼도 『유럽에 팍스 게르마니카(독일의 지배에 의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고 더 타임스지의 논설위원인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은 『EC는 독일 헤게모니에 대비해야 한다』며 대독경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만 프랑스는 그간의 독불 밀월관계등을 고려,영·미와 같은 신경질적인 반응은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피에르 베레고보이 경제장관이 독일의 이자율 인상을 『독일만 생각한 이기주의』라고 비난한바 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독일이 최근 마스트리히트정신에 위배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르 몽드지도 독일을 유럽과 국제무대의 「카이드」라는 세련된 어휘로 비꼬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혈통있는 지도자」라는 뜻이지만 일상회화에선 「막강한 은행강도 보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같은 주변국 및 우방들의 비난을 의식,콜총리는 신년사에서 독일이 결코 패권주의를 지향하지 않고 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넘볼 생각도 없다고 강조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독일인들은 우방들의 이같은 비난이 『독일을 고립·악화시키기 위한 거대한 음모』라는 감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유고의 두 공화국에 대한 승인은 주권국가인 미국등이 이를 유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주권국가로서 독일이 이를 실행에 옮길수 있으며,인플레등 국내경제여건을 고려해 이자율을 인상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권리행사라고 주장하면서 그런데도 이를 맹비난하고 있는 것은 『독일이 통일과 함께 주권국의 위치를 회복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시대착오적인 냉전사고에 매달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신패권주의에 다름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독일과 미·영·불 등 기존 서방 강대국 사이에 이같은 대립이 일고있는 것에 대해 유럽문제 전문가들은 ▲냉전체제의 붕괴로 구소련 및 동유럽 전체가 독일경제권에 편입돼 가고 있고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을 예상외로 쉽게 극복해 가고 있으며 ▲유럽통합이 독일의 주도로 진행되는 등 통일이후 「실세」로 등장하고 있는 독일에 대한 미국등의 견제는 필연적이라고 분석하고 있다.<베를린 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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