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5도 지사|도민 5백만…영지 없는 "망향 총수"|판공비 한푼 없지만 예우는 차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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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실제의 관할 지역·주민도 없이 마음속에 심어두고 온 북녘고향을 지키는 망향의 「행정총수」-이북5도 지사.
남북 총리회담의 진전에 따라 지난해말 기본합의서가 서명되고 핵 문제가 타결되면서 통일에 대한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지고 있는 요즘 5백만 월남 실향민의 정신적 지주인 이북 5도 지사들의 감회는 남다르다.
반세기 가깝게 꿈에 그려온 고향 땅을 밟고 형제·친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다른 실향민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보다 앞서 통일의 여정에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북5도 지사는 현직 차관급 예우를 받으나 일반 지사가 받는 판공비도 없고 시·도지사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다. 49년 첫 임명 이후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위상도 변화돼 왔다.
당초 이북5도 지사는「북진통일」이 운위되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북녘 땅을 수복하고 행정을 장악하기 위한 기구라는 의미가 강했다. 시·도지사 회의에서『이북5도지사는 왜 없느냐』는 이 대통령의 호통에 따라 이북 5도 기구가 설치됐다는 일화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이북5도의 법률적 근거인 특별조치법과 명예시장·군수 위촉 규정이「미수복지에 대한 국토관념을 명백히 하고 실지 회복에 대한 통일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돼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대립에서 화해의 방향으로 변화되면서 이북 5도 지사의 역할도 월남 실향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행정으로 바뀌어왔다.
실향민의 권익과 친선·유대를 강화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이들에게「마음의 고향」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두고 온 북녘 고향의 문화·풍습을 보존·전승함으로써 통일 후 남·북의 이질감 극복에 완충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이 때문에 남북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북5도청과 지사의 위상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바람이다.
지금까지 공식 집계된 월남실향민은 5백46만3천명. 황해도 출신이 1백36만 명으로 가장 많고 함남 1백20만 명, 평남 1백13만 명 순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서울이 1백51만 명으로 가장 많고 부산 60만 명, 강원 56만 명, 경남 45만 명, 경기 46만 명 등.
실향민들은 고향 사람들끼리 강한 연대의식으로 뭉쳐 모두 2천2백88개의 각종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읍·면민회가 무려 8백1개, 시·군민회도 2백75개에 이른다.
이밖에 장학회가 3백19개, 청년회 1백54개, 부녀회 1백14개가 운영되고 있으며 동향 출신 실향민들의 공동묘지인「동산」도 72곳이나 된다.
실향민들은 매년 이북도민 체육대회 이외에 도민· 군민의 날 행사, 향우회·동창회 등 갖가지 모임을 가진다.
이같이 전국에 흩어진 단체·모임에 참석해 동향인들을 격려하고 망향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이북5도 지사의 중요 일과중의 하나. 전국 곳곳 안가는 곳이 없기 때문에「전국지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대 이북5도 지사는 모두 34명. 함남이 가장 많은 9대째 지사를 맡았고 평북이 가장 적은 5대째 지사가 재임 중이다.
이북5도 지사는 비교적 장수하는 것이 특징으로 평북의 백영엽 지사는 21년, 황해도의 김선량 3대 지사와 평남의 박재창 3대 지사는 각각 17년을 재임했다.
반면 6·25때 납북된 황해도의 이운, 함남의 강기덕 초대지사, 작고한 평북의 안치정 4대 지사는 1년을 채우지 못하는 단명에 그쳤다.
이북5도 지사는 특히 초창기엔 월남한 독립운동가가 주로 맡았으나 60년대 이후부터는 공직자 출신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여왔다.
◇황해도=62년부터 79년까지 재임한 김선량 3대 지사(작고)는 36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엔 고당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에 황해도 대표로 참여한 독립운동가. 보성여중·고 교장과 흥사단이사장도 역임했다.
경기도 경국장과 부산시경국장·경찰대학장을 지낸 원용구 5대 지사와 안기부 자문위원을 거친 현재의 방준필 6대 지사는 김선량 지사와 동향인 안악 출생이다.
◇평남=평양출생인 김병연 초대지사(작고)는 3·1독립운동과 흥사단 사건(37년)으로 각각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엔 조선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고 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총무처장을 지냈다. 초대 지사로 10년간 장수했다.
62년부터 79년까지 17년간 장기재임 한 박재창 3대 지사는 평양출생으로 조선민주당청소년 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한 고당 조만식 선생의 측근으로 고당이 연금된 뒤 월남, 현재까지도 고당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덕양 출신의 박인각 4대 지사는 50년대 번계원 국장과 62년 최고회의 법사전문위원을 지냈고 박천 출신의 유기천 5대 지사는 내무부 공무원 등을 거쳐 현재는 민자당 전국구의원.
현재의 김훈기 7대 지사(용강 출생)도 총무처와 통일원·평통 사무차장을 거친 공직자 출신이다.
◇평북=역대 지사 5명중초대 백영엽, 2대 이하영, 4대 안치정 지사 등 3명이 작고했다.
49년부터 70년까지 최장21년을 재임한 백영엽 지사는 의주출생으로 상해임시정부에 관계하며 독립운동을 한목사. 수양동우회 선천지회간사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두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이석봉 4대 지사는 정통내무관료 출신으로 9년을 재임했고 안치정 5대 지사는 학계, 청와대비서관, 강원·경기부지사를 거쳐 취임했으나 6개월만에 총리행정 조정실장에 발탁되어 떠났다. 안 지사는 90년11월 사무실에서 과로로 쓰러져 별세했다.
현재 김사정 5대 지사는 희천 출생으로 전북·경기도경 국장을 지낸 경찰통.
◇함남=덕원 출생의 강기덕 초대 지사는 3·1운동 당시 진성전문학생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민족대표 48명중 한명. 해방 후 월남해 건국대 초대이사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6·25때 납북됐다.
67년부터 79년까지 12년간 재임 한 갑산 출생의 이신득 5대 지사는 만능스포츠맨으로 체신부공무원 출신. 함흥 출생인 이상선 6대 지사(작고)는 문교부와 국회 전문위원을 거쳐 지사를 지낸 뒤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발탁됐다. 북청이 고향인 이재석 7대 지사도 창원·마산시장을 지낸 내무 공무원.
북청 출생인 고고 8대 지사는 85년부터 3년간 함북지사를 지낸 뒤 다시 고향인 함남에 2년간 재임, 유일하게 2개 도의 지사를 역임한 인물.
현재 김태서 9대 지사는 이북5도 위원회 위원강도 겸임하고 있다. 안변 출생으로 5남4녀중 3형제만 월남, 중앙정보부 창설 때부터 24년간 대공업무를 전담해온 북한문제 전문가. 감사원 사무총장과 감사위원 등을 지냈다.
◇함북=60년까지 11년을 재임 한 서상용 초대지사(작고)는 길주 출생으로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한국독립의용군 군사위원과 서부 부장을 역임했으며 한 때는 노령에서 고려공산당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동석 5대 지사는 내무공무원출신으로 유도계 원로이며 현재 지창훈 7대 지사는 철도청 영등포 공작창장을 지냈다. <한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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