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친FTA' 목소리 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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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경제 망치는 FTA 필요 없다. 국민 동의 없는 FTA협상 중단하라."

27일 오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고위급 협상이 진행 중인 서울 하얏트 호텔.

한.미 양국이 열띤 공방을 벌이는 협상장 입구에 호텔 손님을 가장한 시위대가 두 차례 몰려가 기습 시위를 벌였다.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소속 회원과 대학생들인 시위대는 막무가내였다. '한.미 FTA 스톱(STOP)!'이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유인물을 뿌린 뒤 "누구 맘대로 협상을 하느냐. 국민투표 실시하라"고 외쳤다. 때마침 협상장을 나오던 리처드 크라우더 미 농업협상 대표가 놀라 대피했다. 호텔 밖에서도 거리마다 경찰과 대치한 시위대들의 구호 소리만 연일 가득하다.

개방으로 인한 국내 산업 피해를 걱정하는 것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FTA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가있는 것일까. 바른 FTA 실현 국민운동본부 등 일부 단체만이 지지 목소리를 내지만 반대론자의 기세에 눌린 모습이다.

FTA로 가장 많이 이득을 보게 될 사람들은 바로 소비자다. 물건 값이 낮아지고 그로 인해 여유가 생기면 저축과 투자에 더 나설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모습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의 관세장벽이 허물어지면 수출이 늘어나고 투자가 확대되는 효과를 누릴 수혜자다. 그런데도 협상 현장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초조하게 지켜보는 기업 관계자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인들도 윽박지르기에 열중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27일 협상에 집중해야 할 수석대표를 조찬모임에 불러내 "손해 없는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훈계하며 으름장을 놨다. 한국 협상단에까지 직접 서한을 보내 시장개방 확대를 촉구하는 미국 의원들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칠레가 미국과 FTA 협상을 벌일 때 썼던 '옆방 정책(room next door)'은 이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종 이익단체들이 협상장 옆 여러 개의 방을 빌린 뒤 협상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 정책이 내부 의견을 수렴하고 반FTA 정서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우리 정부의 소극적이고 비밀주의적인 협상 태도도 문제지만 침묵 속에서 '무임승차'만을 기대하는 FTA 수혜자들의 모습은 더 문제다. 이제라도 FTA의 이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수혜자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홍병기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