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파산으로 치닫는 '정당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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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주주의의 안정적 제도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국민의 이익에 관한 대표성과 국민에 대한 책임성으로 요약된다. '국민의 입장과 이익을 누가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직접민주정치가 아닌 대의민주주의에선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 국민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자세는 중요하지만 전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 전부가 아닌 그 일부를, 즉 이념이나 정책.이익을 함께하는 당원들이나 일부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대표하면서 지속적으로 국민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민주정당 본연의 역할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한계성은 이렇듯 대표성과 책임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정당제도가 딱할 정도로 부실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당명을 바꾸거나 심지어는 당선자가 앞장서서 탈당하는 사태는 민주주의의 교과서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당치 않은 이변에 해당된다. 정당을 선거 때마다 창당하거나 해산하는 악습은 결국 국민을 우습게 보는, 국민에 대한 약속이나 책임을 가볍게 보는 반민주적 정치 관행일 뿐이다. 이처럼 민주정치의 제도적 핵심인 정당의 부실이 일상화된 데는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왕조적 정치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몽테스키외의 지적대로 민주정치와 책임정치의 성공은 절대왕권과 같은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는 권력분립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는 결국 강력한 의회 제도의 발전으로 가능한 것이다.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될 때 대표성과 책임성을 갖춘 건전한 정당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정치 성향에는 독재는 완강히 거부하면서도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통치하는 정당정치보다는 강력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리는 듯한, 모순된 이중성이 짙게 깔려 있다. 왕건.주몽.대조영의 인기도 이를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결과로 국정의 어려운 고비마다 책임을 질 방법도 없는 대통령에게만 비판의 화살을 집중시키는 '대통령무책임제'를 관행으로 정착시키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민주정치를 바른 궤도로 진입시키려면 중요한 국가과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에게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치인과 정당이 두각을 나타내 국민의 믿음과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우를 볼 때 그동안 여당을 자칭해 온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이를 강력히 반대한다면, 이를 지지하고 추진하는 노무현 대통령 및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결별을 확실히 선언하는 것이 정치의 정수라 하겠다. 야당인 한나라당과 두 대통령 후보 역시 FTA에 대하여 노 대통령과 입장을 같이한다면 이를 국민에게 떳떳하게 공표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 공당 및 정치인의 도리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한나라당이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을 바꿔 햇볕정책에 대한 부정적 자세를 고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포용정책 추진의 수단인 햇볕정책을 수용하되 무엇을 위한 햇볕정책인지, 즉 통일정책의 궁극적 목표를 정확히 밝히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지에 대해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치의 건강 상태가 날로 악화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민 지지도의 하락이 위험 수위에 이른 가운데 나타난 '대통령 따로, 여당 따로'의 증세는 민주정치의 기본인 대표성과 책임성의 상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정당이나 정책보다는 후보를 앞세우는 한국정치의 관행이 자아낸 결과라고 하겠다. 금년 대선을 계기로, 파산으로 치닫는 정당정치와 책임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정치인은 물론 국민 모두가 생각을 가다듬어야할 때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