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가 있는 국토기행|기화선사가 「헌정론」밝힌 봉암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바람소리 물소리에도 귀를 닫고 봄·여름·가을·겨울 그렇게 계절이 옮겨다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산이 있다. 아니 산과 더불어 바깥세상을 걸어잠그고 앉아 화두로 번뇌와 탐욕의 불길을 끄는 절이 있다. 영남의 선비나 보부상들이 한양을 올라가려면 숨가쁘게 넘던 문경 새재(조령) 길은 이제 숱한 일화들 속에 묻히고 새로 뚫린 이화령을 넘으면 문정읍이 나온다.
문경읍에서 점촌쪽으로 10리쯤에 왼편으로 가은으로 가는길이 갈라지고 그 길을 따라 20리쯤 가면 잘 생긴 바위로 얼굴을 한 희양산(희양산)이 올려다보이고 절이 있을성 싶지 않은 한적한 마을과 바짝 붙어서 봉암사(경북문경군가은읍원북리) 경내가 시작된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대사가 창건한절로 구산선문의 으뜸의 절로 희양산문이 되어 3천 수도승이 참선했을 만큼 신라 불교의 큰 도량이었다. 고려에 와서 정진스님이 중창(태조l8년)을 하여 그 장엄에 빛을 더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다시 일으킨 것을 한말에는 의범의 본사가 되어 다시 재난을 입고 1955년에 대웅전을 다시 세웠다.
이런 여사, 이런 수난이야 어느 절인들 없을까마는 봉암사는 오늘 이 나라의 많고많은 절가운데 세상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오직 참선으로 불도를 수행·정진하는 하나뿐인 선방이라는데 뜻이 깊은 절이다. 이름난 절일수록 관광명소가 되어 행락인파로 들끓게 마련인데 봉암사는 절입구에 그 흔한 음식점이나 숙박업소 하나 없이 민가들이 들어섰을 뿐이요, 들고 나는 사람의 그림자도 볼수 없어 경내에 들어서면 바람과 햇빛마저도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바로 이 봉암사가 조선조 초기의 대선사요 선시인이었던 함허당(함허당) 기화스님이 말년에 머무르며 경논을 밝히고 게송(게송)과 선시를 낳았으며 열반(열반)에 든 절이었음에 오늘 이나라 불도의 정수가 여기에서 샘솟는 것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기화의 속성은 유씨로 고려가 기울던 우왕2년(1376년) 11월17일 전명사사의 벼슬을 하는 아버지 총과 어머니 방씨 사이의 아들로 중원(충주)에서 태어난다.
어려서 남다른 총명으로 글을 깨쳐나갔고 자라서는 반궁(귀족의 학교·성균관)의 학생으로 하루에도 수천의 말씀들을 외웠으며 경전을 풀이하고 학문을 논함에 있어 이름이 높았고 문강은 이치가 깊고 오묘했다고 행장에는 씌어 있다.
스물한살때 동문수학하던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삶의 무상함을 느껴 세상안의 생사와 세상밖의 생사를 벗어나는 일승(부처가 되는 길) 의 열반을 닦을 결심을 하게된다.
고려말의 이초현·이장·정몽주등에 의해 융성하던 유학에 깊이 몰입했던 기화는 이날까지 손에 들었던 유교의 경전들을 놓고 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머리를 깎는다.
이듬해 이른봄 양주의 회암사에 가서 왕사인 무학대사의 법요를 듣고 명산대찰을 돌며 수행하기를 일곱해, 다시 회암사에 돌아온 것은 스물여덟살때였다. 선방에 홀로 있으면서 보고듣는 일을 일절 끊고, 먹고 쉬는일에 흐트러짐이 없고, 잠을 쫓아내고 긴밤을 밝혀 거닐고 있었다.
그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시를 읊조린다.
걷고 걷다가 홀연히 머리를 돌리니 산뼈가 구름속에 서있구나.(항항홀회수 산골립운중) 회암사에서 두해를 참선하고 공덕산 대승사에 가서 4년동안 반고를 강론하는 자리를 세번 가진다. 32세에는 천마산 관음굴에서 불법을 펼쳐 많은 사람을 교화시켰다. 다음해는 불희사로 가서 3년동안 법제(수행) 하면서 단월(단월-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태종14년(1414년)3월, 황해도 평산의 자모산 연봉사에 가서 방 하나를 정하고 이름을 「함허당(함허당)」이라고 지으니 그의 아호이자 법명이 된다. 이 절에서 3년을 정진 수행하면서 금강경에 대한 오가(규봉·종경·치문·육사·전대사)의 해설을 강론하는 법회를 세차례나 베푼다.
그는 마친내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산천을 소요하고 인간세상을 넘나들며 마치 바닷물처럼 얽매임이 없이 떠다니며 반야를 가르치고 스스로 깨우침의 시를 줄줄이 남기며 다녔다.
산에 오르고 물을 찾은지 어언세해
오늘에 이르러서야 자연과 더불어
즐거웠음을 알겠네
골짜기의 물은 가자고 하고 산은 멈추라고 하는데
물이 끝내 이겨 나를 유유히 보내네.
-공림사에서 놀며
솔바람은 일만 골짜기에서 나오고
산봉우리는 외로운 달을 이고 있구나
누가 이 산속의 흥취를 맛보고
영원히 티끌세상을 떠날수 있을까
-산중의 아름다움을 혼자 누리는 부끄러움
그의 시는 끝이 없다. 발 닿는, 눈 가는 곳마다 그의 시는 거기에 한편씩 놓여진다. 산을 보면 산, 물을 보면 물, 꽃을 보면 꽃, 사람을 보면 사람, 시를 보면 시, 경전을 읽으면 경전이 모두 그에게서는 시로 우루루 우루루 쏟아져 나온다.
장시만해도「원각경송 16강」「법화경송 31강」「법왕가-「반야가」등 10여편이 되고 전해지는 시편들이 2백여수가 되니 그밖에 당에 묻히고 물에 흘러간 시들이야 어떠했으랴.
기화는 42세되던 해 늦가을 오대산에 들어가 오대의 여러성인들에게 절하고 그 암자에서 잠을 자는데 한 신승이 나타나 「그대의 이름을 기화라하고 호를 득통으로 하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꿈을 깨니 몸에 기운이 솟고 상쾌함이 하늘을 날듯하였다. 그는 이로부터 이전의 이름 수이는 기화로 쓰고 호무준은 득통이 된다.
그가 깨친 일 승의 진리는 나라 안에 널리 퍼져 그 빛이 날로 더해갔다. 세종3년(1421년) 기화는 세종의 부름을 받고 개성의 대자사에 머물게된다. 대자사는 당시 어찰이었고 기화로 하여금 거기에서 임금의 어머니의 천도를 빌게하고 임금과 신하들이 친히 나와 설법을 듣고자함이었다. 그의 설법은 소리가 맑고 이치가 오묘하여 마치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이는듯 멀리나 가까이서 듣는 이들은 감복에 기쁨을 넘치게 하였다.
그러기를 4년, 그는 대자사를 물러나와 길상·운악·공덕등 여러산을 옮겨다니며 깨달음에 깨달음을 보태고 대중을 눈뜨게하며 기울어져가는 불교의 중흥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고려가 끝날무렵 이장등은『냇가와 산골짜기에 절이 아닌곳이 없다』고 넘치게 절을 짓는 것을 경계하고 억불론을 펼쳤으며 조선조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불씨잡변』등의 저술로 불교의 타락상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배불정책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조선조에 와서는 유학자들의 세력이 팽창하여 불교는 박해와 수난속에 사그러져가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이자 스승인 무학이 죽은다음 기화는 전국의 유생들로부터 빗발치는 배불숭유의 화살을 혼자받아내야 했다.
그가 많은 불경의 해설을 쓰고 선시들을 남겼으나 유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불교의 진수를 바르게 알리고자 문답형식으로 쓴 『현정론』은 기화의 온전한 사상이 담긴 명저라 하겠다.
『체(사물의 근본, 깨달음)는 유무가 아니면서 유무에 통하며 본래 과거와 현재가 없으면서 과거와 현재에 통하는 것으로 이것이 도이다』라고 시작하는 현정론은 유교와 불교의 근본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유교의 근본인 「오상」을 불교의 「오계」로 풀어 「살생하지 않는 것이 인이요,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 의요, 간음하지 않는 것이 예요, 술마시지 않는것이 지요, 망발을 하지 않는것이 신」이라고 설명한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인을 말하면서 살생을 금하지 않는데 회의를 품고 불교에 귀의했음을 고백하고 근본은 같으나 실천방법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에 가서 「도·유·불 삼가가 일컫는 바가 서로 부합되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과 같다」고 유·불·선의 백미가 하나임을 천명한다. 당시 불교의 참뜻을 모르고 유교만 내세우는 유생들에게 『현정론』은 눈과 귀를 열게 하는 강론이었다.
그는 말년에 여기 희양산봉암사에 정좌한다. 기록에는 세종13년(1431년) 가을 허물어진 절을 수리했다고 되어있는데 그가 대자사를 나온 세종 6년 이후의 행적이 나오지않고 있는것과 그가 지은 『원각경소』에 「희양사문 함허」라고 쓴것을 보면 세종13년 보다 몇해 앞서 봉암사에 와서 저술을 하고 사찰의 중수를 착수했다고 보여진다.
기화는 세종15년(1433년)4월 초하룻날 「떠남에 있어 바라보니 시방세계가 푸른 허공이구나, 없는 가운데 길이 있으니 극락세계로구나」하는 임종계를 남기고 세수58세 법랍(중의나이) 지세로 열반에 든다. 효령대군의 청으로 세종은 기화의 사리를 봉암사·현등사·정수사·연봉사 네곳에 봉안하고 부도를 세우게 한다.
조선 초기에 들끓었던 유생들의 불교배척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대선사이며 위대한 선시인이었던 기화는 지금 희양산 기슭에 「함허당득통지탑」으로 하늘을 받쳐들고 서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