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페루 - 안데스 시골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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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에서 장기 체류하고 있던 어느 일요일 새벽, 호스텔 직원 마르코와 나는 그의 부모님 댁에 갔다. 그는 일요일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착한 청년이었다.

마르코의 고향은 쿠스코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루크레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산속 깊은 곳이지만 허름하게나마 스페인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모든 농가의 주요 경작물은 알갱이가 엄지손톱만 한 옥수수와 갖가지 종류의 감자. 그리고 그날 우리가 할 일은 옥수수 밭이랑 일구기와 감자밭 잡초 뽑기였다.

우리나라의 호미처럼 생겼지만 다섯 배는 큰 연장으로 이랑을 일구고 맨손으로 잡초를 뽑은 뒤 새참을 먹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옥수수죽을 만들어 오셨다. 부위를 예측할 수 없는 염소고기가 들어 있었다. 잡초로 착각해 감자 순 세 개를 뽑은 걸 제외하면 나름대로 한몫을 해냈다고 자부하며 맛있게 먹었다. 우리나라의 막걸리와도 같은 치차(옥수수술)가 쉴 새 없이 몇 순배 돌았다.

오전 일을 마치고 돌아간 마르코의 집에서는 정오 이전에 죽어보자 하는 식으로 맥주잔 돌리기가 이어졌다. 단 하나의 잔으로 여럿이 돌려 마시는 끈적끈적한 자리였다. 고원지대라 더 그랬는지 나는 그야말로 제대로 취해 버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후에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마르코는 '쿠이(사진)'라는 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여기서 조금 가면 티폰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쿠이는 거기서 먹어야 해."

쿠이는 기니피그라는 조그만 동물을 통째로 굽는 요리였다. 소나 말이 없었던 식민지 이전 시대의 페루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영양식이었다고 한다.

마르코는 마치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 몰랐지?'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솜씨 좋게 발라 먹었다. 발톱과 이빨이 그대로 붙어 있어 좀 괴기스럽게 보였지만 사실 맛은 좋았다. 뒷다리를 뜯으며 한국에서는 개를 먹는다고 말해 줬다. 대가리를 발라 먹고 있던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라뭐라 했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른쪽 뒷다리를 뜯으며 자연스러운 미소로 넘겼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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