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유학 김지일씨(귀순북한인들 자본주의 「학습」: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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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너무 큰 화폐단위 가늠못해 당혹감/낯설던 노사분규 이젠 이해할줄도
남북한간 교류합의서 체결로 남북교류와 화해에 대한 기대가 다시 커지고 있다. 남북교류는 그러나 경제체제·이념의 차이로 인해 한동안은 서로가 당혹감을 느끼는 과정을 겪어야 할 전망이다. 최근 북한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 이곳 자본주의 경제체제속에서 느끼고 겪는 일상적 적응과정은 그런 의미에서 남북간 인적교류의 좋은 시금석이 된다. 귀순자 3명의 최근 경험담을 차례로 싣는다.<편집자주>
그는 이곳의 첫 직장에 취직하면서 자기가 받을 봉급이 얼마인지를 묻지 못했다.
「돈을 요구하고 자기 것을 찾아 먹는 행위는 나쁜 짓」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취직후 넉달이 지난 요즘 출퇴근길의 그는 스스로의 표현마따나 「정신나간 사람」이 됐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돈벌 아이디어」 찾기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소련 유학중 지난해 8월 동구를 거쳐 귀순,16일 소련인 약혼녀 왈랴씨(27)와 딸 연아양(3)과 재회한 김지일씨(27·외대 대학원 러시아어과)는 아직도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학습」에 여념이 없다.
「돈을 벌 아이디어」의 표본으로 「주름을 잡아 구부리기 쉽게 만든 빨대」를 서슴없이 예로 드는 그는 분명히 「재산축적의 동기」를 이곳에서 함빡 부여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본주의 경제체제속의 어설픈 시민인 것이,난생 처음으로 용산 전자상가에서 전화기를 사며 썼던 「바가지」에 대해 『수요가 있으니 가격이 올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는 나름대로의 사후해석을 달고 있다.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바가지는 가격정보의 부재나 무지에서 오는 것이지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로 편입되면서 그가 첫번째 겪었던 당혹감중의 하나는 바로 「돈의 단위」였다.
그의 표현을 곧이 곧대로 빌리면 『돈 단위가 너무 커 개념이 잡히질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김지일씨의 속셈으로 따질때 1천원은 「라면 몇번 먹을 돈」이고 1만원은 「영화 한두번 볼 수 있는 돈」이며,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돈은 「조단위」다.
정주영씨 이야기가 나오니 그는 『북에서 배우기로는 재벌이 정부를 선택하고 정부는 허수아비라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도 『개인이 큰 소리치는 것을 보니 한국 재벌도 많이 커진 것 같다』라고 토를 달기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로 돌아오면 금세 『한 학기에 1백21만원의 학비를 낼때면 「가슴이 알알」했으며 월급에서 세금을 낼때는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가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부딪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경험은 이밖에도 많다.
김씨는 남한에 와서 노사분규를 지켜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돈을 더 달라는 요구는 떳떳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의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되씹고 있다.
그는 이제 『노조는 필요하며 기업도 살고 종업원도 살자는 인식의 확산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업의 기능에 대해 『상품생산을 통해 부를 창조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고 설명하는 김씨는 『사회주의에서는 가치의 본질이 노동자의 몫이라고 하지만 사실 가치란 노동과 「기업의 부가가치」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주식에 대해 북한에서도 배웠다며 「경제활동을 위해 필요한 돈을 거두는 방법」이라고 말하며 자신도 조금 더 배워서 주식투자를 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한을 세계에서 「30등정도의 부자」로 평가하며 동유럽과 비교할때 생활수준에서 한국이 크게 앞서있는 것은 아니나 소비수준은 1.5배정도 된다고 비교한다.
또 옷·신발·전자제품 등의 값은 싸지만 음식값·문화생활비용·책값 등은 매우 비싸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학생활을 했던 김씨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국민경제의 국제비교인 것이다.
『사회주의는 잘하나 못하나 차이가 없는 평균주의 때문에 열의를 끌어내지 못해 한계에 부닥치고 있습니다. 이윤추구·경쟁을 통해 창조력·사회발전을 가져오는게 시장경제의 장점이라고 봅니다. 빈부격차의 문제가 있으나 복지정책을 통해 해소해나가면 되겠지요.』
그가 요약해서 말하는 자본주의 론인데,그의 현재 희망중의 하나는 부인 왈랴씨와 「맞벌이」를 하는 것이다.<김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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