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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침묵의 카르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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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각 정당들의 반응은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열린우리당은 "김 전 대통령의 범여권 대통합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장영달 원내대표)"이라고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았다. 민주당 강세 지역인 전남에 그렇지 않아도 마땅한 후보를 내놓기 어려운 판이었으니 차제에 '김씨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를 내지 않을 모양이다.

'DJ 철학의 계승'을 내세워 왔던 민주당은 후보를 내자니 DJ가 걸리고 안 내자니 앞으로의 범여권 통합 국면에서 발언권 약화를 감수해야 하는 덫에 빠졌다. 그래서 김씨를 어떻게든 민주당 후보로 공천하려고 안간힘이다. 한나라당도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며 발을 뺐다. 그나마 "문제가 있고 자중해야 할 사람이 출마 선언을 한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민노당의 지적이 정치권의 유일한 공식 비판 논평이었다.

홍업씨 출마 선언을 계기로 확인된 것은 DJ의 건재 사실이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4년이 지났어도 DJ는 죽은 권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임을 보여준 셈이다. 그 힘의 원천은 호남 주민들의 DJ에 대한 아직 식지 않은 애정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홍업씨 출마 선언에 싫은 소리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실제 이유다. 혹시 그것이 DJ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나에게 등 돌린 사람은 용납할 수 있어도 내 자식에게 해코지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못 한다"는 게 세상 부모의 마음이란 걸 헤아린 탓일까. 한나라당의 대선 예비후보들도 DJ에게 미운털 박히기 싫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김씨 출마 선언을 둘러싼 정치권의 '침묵의 카르텔'은 이렇게 구축됐다.

한국 정치는 홍업씨가 출마 선언을 하는 순간 그 바닥을 드러냈다. 그 얄팍함과 천박함에 깜짝 놀랄 지경이다. 몇 해 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여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에서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결국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국정을 농단한 현철씨를 어떻게 홍업씨와 비교하느냐'고? 홍업씨도 만만찮았다. 아버지 재임 시절 홍업씨의 집 베란다에서 발견된 10만원권 헌 수표 1만 장은 무엇이며, 수십억원의 기업 청탁자금을 받은 혐의로 실형을 살았던 것은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인가. 호남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무례가 없다. 홍업씨를 떨어뜨리자니 DJ가 눈에 밟히고, 표를 주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수십 년간 DJ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보냈던 사람들에게 그런 고민을 안겨주는 건 정치 도의에서 벗어난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은 김 전 대통령 부부뿐이다. 동교동계 출신인 한 전직 의원은 "홍업씨 주변에서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우리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적지 않다"고 했다. 다만 평생 아버지 때문에 고생한 자식들에 대한 DJ의 마음이 어떤지 뻔히 알기에 차마 대놓고 반대의 뜻을 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DJ도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떻든 홍업씨의 출마는 현실 정치에서는 DJ의 뜻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건 DJ에게도 누가 된다.

정당들과 대선 예비주자들이 김씨 출마에 공식 의견을 내놔야 한다. 이런 비겁한 침묵의 카르텔을 지속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수치다. 누가 악역을 대신해 주기를 기다리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대표정당 되기를, 또 지도자가 되기를 포기하라. 이런 문제에 분명한 선을 긋지 못한다면 설령 대선에서 DJ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국민의 납득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