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경영 서종호|영화 들여오는대로 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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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종호남아진흥회장(1916년생)은 76세로 최연장영화사 경영자. 20년전 기획을 마치고 방대한 제작비 때문에 성큼 착수하지 못한 안수길원작, 이상현·윤삼륙각본, 유현목감독의 『북간도』는 아직도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만주땅 용정을 주무대로 4대에 걸쳐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면 중국·소련·일본의 각 세력 하에서 변천하는 건물을 비롯한 온갖 풍물상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다 돈이든다.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불암리에 소유하고 있는 8만평 농장에 그는 2백20평짜리 스튜디오, 용정거리 재현을 위한 오픈세트용으르 8천평을 닦아놓았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그 8천평에는 배나무를 심어버리고 말았다.
며칠전 유현목과 만나 맥주를 마시며 한국에서 찍든, 중국에 가서 찍든 이루지 못한 기획을 꼭 실현하자고 다짐했다.
그가 『북간도』제작에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당시 신경법대를 다닌 그의 청춘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를 나온 그는 조선방송협회 산하 부산방송국에 들어갔다.
그는 일제말기 단파청취사건에 말려들어 몇몇 동지들과 함께 경남도경에 체포돼 그 당시 악명 높던 조선인 형사 하팔락·강락중·김소백등에게 취조받으며 혼이 나기도했다. 해방이 되자 부산방송국장이 됐다. 60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좌·우익이 상충하는 혼란기를 슬기롭게 넘겼다.
후에 경향신문사장·문교부장관등을 역임한 박점현씨가 김지태씨로부터 부산일보를 인수받아 같이 하자고 했다. 전무경 총무부장으로 일했는데 전쟁이 나자 조경희·오소백등 제씨가 와서 편집부 간부로 같이 일하며 막걸리도 함께 마셨다.
적자경영으로 허덕이게되자 부산일보는 김지태씨에게 돌려주고 서종호씨는 무역상 남화흥업을 시작했다. 이때 일제때 파라마운트지사 지배인을 한정병모씨가 와서 영화도 하라고 한다. 처음 2년간은 안돼 그에게 물려주고 조금 있다가 직접시작했다. 그것이 영화계와의 인연이 됐다.
타이론 파워 주연의 『혈과 사』『사외의 길』, 진 피터스주연의 『여해적 앤』등을 들여왔는데 모두 대흥행이었다. 그후 타이론 파워 영화는 거의 다 들여와 성공했다. 『알렉산더대왕』『대제의 밀사』등도 대흥행이었다. 불과 수천달러짜리 장 마레영화들도 들여다 거는대로 관객이 쇄도했다. 『카르멘』『가죽코』『반란』 『거인의 길』『기토도』등이 있었다.
그당시 유럽 영화는 수입가격이 미국영화의 3분의1정도였다. 그리고 요새와는 달리 40, 50대 사람들도 다 영화를 보던 시대였다.
『복활』역시 대흥행이었는데 그것을 건 명보극장 주인이 80%를 탈세해 잡혀가는 소동도 있었다. 이쪽에서는 매상의 40%만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에 탈세와는 무관했다.
근래의 것으로는 『패튼대전차군단』『내일을 향해쏴라』 『시실리안』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 『테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지옥의 묵시록』등이 있다. 외화의 황금기였던 그 시절 그는 모두 50편쯤의 외화를 들여왔다.
한국영화는 80편쯤 제작했다. 한형모감독·조흔파원작의 『남성대 여성』(59년)을 비롯해 김수용감독의 『빙점』(67년) 『석녀』(69년) 유현목감독의 『불꽃』(75년) 『장마』(79년), 고영남감독의 『꽃신』(78년)『소나기』(78년) 『빙점81』 (81년)등등.『소나기』는 그 당시 베를린영화제 관계자가 와서 보고 꼭 출품하라고 했는데 영화진흥공사담당자가 마감날짜를 잘못알고 늦게 보내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서종호씨는 영화수출입협회장 당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수출입계 질서와 제작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영화진흥조합을 창립하느라 3년간 무척 애썼다.
영화진흥기금의 무상대부를 주장했으나 관에서는 담보대부를 고집해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 영화진흥공사가 설립되고 그는 당시 장관에게 밉게 보여 1년7개월동안 회원가입이 안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이원경문공부장관이 그 부당성을 인정하고 회원 가입을 시켜주었다.
영화계란 말이 많은 곳으로 알러져 있는데 서종호씨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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