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blog] '영구결번' … 그때그때 달라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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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미국 프로농구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의 23번, 메이저리그 베이브 루스(뉴욕 양키스)의 3번은 대표적인 영구결번 사례입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한 구단에서 오래 뛰면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팬들의 사랑을 받은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영구결번을 줍니다. 국내에서도 프로농구에서는 작고한 '전자 슈터' 김현준(10번.삼성)과 '농구 천재' 허재(9번.TG→동부)가, 프로야구에서는 박철순(21번.OB→두산), 김용수(41번.LG) 등이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프로축구에서는 부산 아이파크만이 2개의 영구결번을 갖고 있습니다. 이 팀의 전신인 부산 대우 시절 '야생마' 김주성(16번)과 2002년 월드컵 영웅 송종국(24번)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올 시즌을 시작하면서 FC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적한 한정화(25)가 등번호 24번을 달았습니다. 송종국의 영구결번이 사라져버린 것이죠. 원래 한정화는 33번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앤디 애글리 감독이 "굳이 뒷번호를 할 필요가 있나"라며 16번을 제안했습니다. 16번이 김주성의 영구결번이란 걸 몰랐던 거죠. 머쓱해진 애글리 감독이 또다시 내놓은 번호가 하필 24번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체면을 구기게 된 애글리 감독이 구단과 상의했고, 한정화에게 24번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부산 구단은 영구결번을 없애버리면서 송종국 선수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산의 전재민 사무국장은 "24번은 영구결번으로 정했다기보다는 송종국이 돌아올 때까지 비워놓겠다는 의미였다. 송종국이 수원으로 갔기 때문에 24번을 결번 처리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부산은 2002년 8월 19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떠나는 송종국의 고별식을 열어주면서 "24번을 영구 결번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이때도 말이 많았습니다. 부산 팬들은 "불과 두 시즌밖에 뛰지 않았고, 팀을 위해 해놓은 것도 없는 신인급 선수에게 영구결번의 영예를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크게 반발했습니다.

기자로부터 영구결번 취소 소식을 전해들은 송 선수는 "크게 신경은 쓰지 않지만 기분은 좋지 않다. 내가 언제 영구결번해 달라고 했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부산 구단은 영구결번을 정할 때도, 취소할 때도 마음대로 했습니다. '영구결번'에 담겨 있는 역사와 개인의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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