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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과학칼럼

빛에 얼어버린 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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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기체 상태의 원자는 상온에서 평균 시속 4000km로 움직인다고 한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의 3배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는 그 움직임 효과에 의해 생기는 오차 때문에 원자의 고유한 특성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다. 원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공간에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원자의 성질은 물론 내부 구조도 천천히 아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해결 방법은 플래시맨 만화처럼 원자를 얼리는 것이다. 기체의 온도를 내리면 기체 내 원자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섭씨 영하 273도인 절대영도가 되면 원자는 얼어서 정지한다. 과학자들은 온도를 절대영도 가까이로 내려 기체 상태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원자들을 얼려서 공중에 붙잡아 놓은 다음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대기압에서는 온도를 내리는 과정에서 원자들이 응축돼 액체나 고체 덩어리로 변한다. 수증기가 온도를 내리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1975년 미국 스탠퍼드대의 아서 샬로 교수와 핸시 시어도어 교수는 빛을 이용해 원자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빛은 파동인 동시에 알갱이이기도 하기 때문에 광자(光子)라고도 불리며 물체에 힘을 전달해 준다. 이 힘을 광압(光壓)이라고 한다. 광자가 전달하는 힘 자체는 아주 미미하다. 그러나 원자도 매우 작기 때문에 원자가 느끼는 광자의 힘은 상당해 광자는 원자에 충돌하면서 큰 힘을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원자의 움직이는 방향과 정반대로 날아온 광자가 원자에 충돌 흡수되면, 광자는 원자가 움직이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힘을 작용해 원자의 속도를 줄일 수 있게 된다.

85년 미국 벨연구소의 스티븐 추 박사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의 윌리엄 필립스 박사는 기체 상태 원자에 레이저 빛을 쪼여 원자의 속도를 계속 줄임으로써 결국 원자를 공중에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다. 88년에는 프랑스 콜레주드프랑수아 파리고등사범학교의 클로드 코엔타누지 교수가 레이저 빛에 의해 붙잡혀 있는 원자들의 온도가 거의 절대영도라는 것을 밝혀냈다. 즉 이들 원자는 실제로 얼어 있다는 것이다. 레이저 빛이 원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얼린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레이저 냉각 및 포획(laser cooling and trapping)이라고 한다. 지금은 미국 스탠퍼드대로 옮긴 추 교수와 필립스 박사, 그리고 타누지 교수는 '원자를 얼리는 레이저 광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1997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 후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게르하르트 렘페 박사는 2004년 3월 4일자 네이처지에 기존의 방법에 비해 5배나 더 빠르게 원자를 얼릴 수 있는 새로운 레이저 냉각 기술을 발표했다.

이러한 레이저 냉각 기술은 지상위치측정시스템(GPS)용 인공위성에 장착돼 있는 원자시계의 정밀도를 100배 이상 증가시켜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나 휴대전화 속에 있는 위치추적시스템의 정확도를 ㎜ 이하로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이 기술은 도청이 불가능한 양자통신, 연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양자컴퓨터, 원자레이저 등에도 이용될 것이다.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빛이 원자를 차갑게 얼릴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하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빛의 특성도 그러한 것 같다. 빛의 어떤 다른 얼굴이 또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종민 광주과학기술원 고등광기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