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룡의 『스크립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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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언어에도 성감대 같은 것이 있다. 「고향」이란 말이 그 중의 하나다.「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이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시에 몰려 사는 현대인의 태반이 이른바 출세한 촌놈들인 마당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출세한 촌놈들이라 해도 겨우 월급쟁이 수준이지만, 좌우간 이들이 그나마 도시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향의 희생 위에서 겨우 가능했던 것 아닌가.
고향에의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란 갈 분석해보면 속죄의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가 30년대 미국의 황폐화를 이 제목으로 다루었고, 80년대 초에 이문열씨가 또한 이 제목으로 소설을 써냈다. 이제 90년대 초, 신인 유정룡씨에 의해 이 제목의 중편이 씌어졌다. 「스크립터」(『문학정신』11월호)가 그것.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러니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일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치 않다. 작품의 주체가 작가인지 독자인지, 아니면 언어 자체인지를 묻는 일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셋은 알게 모르게, 또 많든 적든 앞에 있었던 작품과의 비판(비교)에 관련되어있는 만큼 평가(이해)기준의 근거를 이미 씌어진 이 계열의 다른 작품에 두는 일이 불가피해진다.
그 때문에 이문열씨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란 이 경우 하나의 준거가 아닐 수 없다. 이문열씨의 경우 고향의 의미란 단순한·그리움이나 그것에 연결된 속죄의식과는 달리 역사에의 원한에 관련되었음이 특정적이자 특권적이다.
곧 「가짜 역사」(위사)에의 열정인데, 이 낭만적 열정은 자칫하면 허망해지기 쉽지만 이씨에 있어서는 이 허황성이 이상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역사에의 사적인 범주에서 공적인 것에로 연결되어 있었음과 이는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권적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비할 때 「스크립터」는 어떠한가. 반가의 법도를 떳떳이 계승치 못한 서얼의 자손 최민수가 신분상승의 길을 달려가다 좌절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가짜 역사」범주에 든다. 역사에의 원한의 일종인 까닭이다(작가 유씨가 그 위에 지역감정을 표면으로 내세운 것은 작가적 오기랄까, 젊은 혈기에서 말미암은 것. 따라서 순미한 가짜 역사의 형식에 해를 입힌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는 종래의 「가짜 역사」류에 대한 비관의 의미를 묻는 것에 해당한다. 종래의「가짜 역사」가 서얼층의 환상적 자기만족의 일종이라면, 최민수의 신분상승 욕구의 좌절(죽음)이란 인류학적 과제라는 사실.
이는 단연 새로움이다. 한 공동체가 질서(정치적 현실)유지를 위해 취하는 고유한 방식중의 하나가 희생양의 창출이며, 이를 인류학적 과제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양의 창출과정에서는 하수인이 요청되는 법이며, 그 하수인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에 닿게 마련이다.
왜? 공동체의 비밀을 그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김윤식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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