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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실체 정확히 파악하자(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합시다」­서울시청 현관위에 드높이 붙어 있는 대형간판이 늦가을의 찬바람처럼 허허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웬일인가. 여지껏 남은 재산이 있다고 믿는 탓인지,왕창 망해서 거리에 나앉아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여건과 환경은 조성하지 않은채 일하라고 성화만 부리고 있는 탓인지,아직도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절박한 실정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 해 무역 적자가 1백억달러,그동안 쌓인 총외채가 4백억달러에 육박하고 자금난·기술난·인력난으로 3천4백여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지만 눈앞의 절벽에 눈감은채 과소비 질주를 멈출줄 모른다.
이런 형편인데도 산업현장의 근로자 70%가 「수입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잔업은 피하고 개인 여가를 갖겠다」는 답답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지난 3년간 연평균 임금이 26.4% 올랐지만 노동의 생산성은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고 제품의 불량률은 6.1%로 일본과 대만에 비해 3∼6배가 높다. 노동비용은 급속히 신장되었지만 일하자는 풍토보다는 놀자는 풍조가 몇년째 계속되면서 노동생산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불량제품은 늘어만 가는 최악의 길을 치닫고 있다.
위와 아래,잘 살고 못살고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놀고 쓰고 편하게 지내기에 광분하고 있을 뿐이다. 방만과 무사안일에 노사분규와 탐욕적 과소비 풍조까지 겹친 지난 3년여의 무절제한 생활속에서 과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빚더미와 사회적 무질서·무규범,향락을 위한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패륜이라도 서슴지 않는 반인륜적 사회풍조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바닥이 드러나는 경제와 황폐해진 사회풍조를 앞에 두고 기업가는 노사분규와 임금상승을 이유로 근로자에게 책임을 미루고 근로자는 기업가의 부도덕성과 부동산투기를 고발하면서 서로가 내탓은 덮어두고 남의 탓 손가락질에 여념이 없다. 정부 또한 어느 누가 나서서 다잡아 계획을 세우고 갈 길을 제시하는 사람없이 96년에는 1인당 GNP 1만달러,2000년대에는 몇만달러라는 공허한 청사진만 남발한채 방만과 안일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냉정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실체를 직시하고 풀어나가야 할 위중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정부·기업인·근로자 모두가 솔직이 인정해야 한다. 위기의 실체가 남이 아닌 나 자신때문이라는 인식이 공감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열심히 일하자는 주장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위기상황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위기의 실체가 나 자신에게 도사리고 있다는 인식의 토대위에서 무엇을 어떻게 일할 것인가 지혜를 모아 풀어 나가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더 일하고 덜 놀고,더 벌고 덜 쓰는 길밖에 없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절약하는 길이 꽉막힌 현실을 타개하고 암담한 내일을 여는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개발독재 시절의 「채찍과 당근」이 문제해결의 방식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정부·기업·근로자가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당사자라면 2인3각의 공동노력이 위기상황을 푸는 지혜인 것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희생만을 강요하거나 어느 한쪽에만 유리한 방법으로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열심히 일하자는 운동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율과 솔선이 전제되어야만 그 힘이 배가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더이상 임금보다 물가가,물가보다 부동산 값이 더 높이 뛰는 일이 없도록 경제정책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며 불로소득이 근로소득을 앞지르는 풍조는 과감히 차단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와 기업에는 정책적지원을 아끼지 않는 새 기풍의 근로풍토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기업가는 지난 3년여 노사분규의 경험을 십분 살려 근로자를 기업의 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책임진다는 신뢰감을 근로자에게 심어줘야 할 것이다.
근로자는 임금투쟁만이 자신의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이 아님을 지난 투쟁의 경험에서 확인한 이상,열심히 더 일하는 길만이 자신의 생활과 일터의 장래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거듭 다짐해야 할 것이다. 열과 성의가 넘쳐나는 근로자의 근면성과 기술향상이 자신과 국가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임을 깨달아야 한다.
정부·기업·근로자가 벼랑에 선 우리 사회를 구출하는 3주역이라는 결의가 뜨거운 가슴으로 뭉쳐지고 실천에 옮겨질 때,「우리 모두 열심히 일합시다」라는 현수막 없이도 기업과 사회는 활기를 되찾을 것이며 아시아의 「지렁이」라는 욕된 말을 다시는 안듣게 될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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