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진보학자 마르크스이론 비판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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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마르크스를 연구해온 소장·진보학자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이론을 비관하고 그간의 연구자세를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80년대 중반 활발했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시작돼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으로 이어져온 진보학계의 연구경향이 크게 바뀌고있다는 반증이어서 주목된다.
최근 진보학계의 최대화제가 되고 있는 이병천교수(강원대)의 논문은 변화의 흐름을 상징한다.
진보적 소장경제학자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던 이교수는 한국사회경제학회에서 펴낸 『사회정제평론』 4호에「마르크스역사관의 재검토」란 논문을 기고, 『마르크시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해 학계의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교수의 주장은 소련·동구사회주의의 붕괴책임을 마르크시즘 자체보다 이를 왜곡한 「스탈린이즘」에 돌렸던 대다수 진보학계의 평가를 정면 반박한 것이다.
또 『소련·동구사회는 비록 실패했지만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진보적 실험이었다』는 기존의 평가에 대해서도 『공산주의를 지향한 사회가 아니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교수는 『마르크시즘의 역사관은 소련·동구의 붕괴에 근원적 책임이 있다』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지적오만」이라고 맹비판한다. 마르크스 역사관에서 「자본주의의 멸망과 공산주의의 이상사회실현」이라는 결정론이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전체주의국가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은 인간생활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단순화, 정치문화·예술·종교·윤리등의 독자적 의미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이같은 마르크스역사관의 문제점이 집약된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론』이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민주화운동·환경보호운동·여성운동등 다양한 사회운동 모두가 사회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교수는 새로운 진보이념은 『마르크스이론외에 진보적 이론을 포괄해야하며, 마르크스이론은 그중의 일부가 돼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포스트마르크시즘」이라고 이름붙였다.
이같은 글은 마르크시즘을 연구해온 대표적 학자가 「소련·동구의 잘못된 마르크시즘」이 아니라 「마르크시즘자체」의 문제를 지적하고 재검토할 것을 주장한 것이어서 진보학계내의 반발을 사고있다.
진보학계의 월간지인 『사회평론』이 다음호에 반론을 게재할 예정이며,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내부적으로 논쟁을 준비중이다.
그러나 이교수의 주장이 『한 개인의 돌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전반적 반응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진보학계 내에서 적어도 소련식(스탈린식)마르크시즘을 강조하는 주장은 급속히 쇠퇴해왔으며, 동시에 마르크시즘에 대한 회의가 확산돼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영희교수(한양대)의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고백이다.
진보학계에서 보다 설득력있는 목소리는 「마르크시즘자체에 대한 비판」보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연구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한마디로 『국내학자중 마르크시즘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라는 자괴와 반성의 목소리다.
한국철학사상연구소간 『시대와 철학』 최근호에 실린 최종욱교수(국민대)의 시론이 그 대표적 예다.
최교수는 『정직하고 솔직하자』며 『마르크스에 대한무지·오해·편견을 솔직이 시인하고 고백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최교수는 『마르크스는 신이 아니라 한 사람의 비범한 실천적 사상가일 뿐이다』며 한계를 지적하고 『마르크시즘을 비판·발전시켜온 서구 마르크시즘의 풍부한 이론을 알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우리사회가 자본주의로 존재하는한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시즘은 유용하며 필요하다』고 객관적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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