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진짜 거칠어서, 정말 삐딱해서 '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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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권여선(41.사진)이란 작가를 좋아한다. 쉬 읽히지 않는 소설을 쓰며, 따라서 잘 팔리지도 않는 작가다. 등단작(1996년 장편 '푸르른 잎새'로 상상문학상 수상)말고는 변변한 문학상 하나 못 받았고, 사실 발표한 작품 수도 몇 안 된다. 그럼에도 권여선을,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 거리가 있다. 작가에겐 실례겠지만, 음식에 빗대 말할 수 있겠다. 가령 예쁘게 차려놓은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에 물렸을 때, 그래서 거칠고 성긴, 나아가 자극적인 음식이 문득 궁금해질 때를 상상해보자. 너무나 매워 통증으로 인식되거나 덜 익은 자두처럼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 권여선의 소설은 이러한 맛이 떠오른다. 평소엔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강렬하게 각인되는 특이한, 하여 특별한 맛 말이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도 딱 이 맛이다. 단편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 로라는 곰보인데다 째보다. 성격이라도 좋으냐, 절대 아니다. 로라는 습관적 히스테리 환자다. 로라는 어머니를 끔찍이 싫어한다. 자신과 달리 우아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 때문이다. 로라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남자도 쫓아낸다. 그가 남긴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다. '학을 떼겠네'.

표제작으로 올린 단편 '분홍 리본의 시절'엔 악의적인 묘사와 깐죽대는 표현이 도드라진다. 개중 몇몇 대목을 옮긴다. 면전의 상대에게 이딴 식으로 말을 했다간 따귀라도 한 대 맞기 십상인, 꼬여도 한참 꼬인 구절들이다.

'복슬강아지에게조차 말을 놓지 않을 것 같은 선배 아내의 존댓말'

'중산층의 표지는 육류를 즐기지 않는 데 있다기보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있는 모양'

'불온을 자처하는 친구들이 사복의 눈을 피해 교정 한 귀퉁이 고즈넉한 곳에서야 비로소 동지를 알은척하는 첩보놀이에 목숨을 걸던 시절'

권여선은 문장도 거칠다. 엉성한 번역문처럼 복잡하고 투박하다. 수사(修辭)를 부릴 때도 대상을 곱게 꾸며 내놓으려는 생각이 없다. 되레 볼썽사나운 형용과 비유만 즐비하다. 좋은 예가 있다.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 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세상에, 순댓국처럼 아름다운 풍경…, 이란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소설은 전에도 있었다. 하나 이전의 삐딱한 시선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였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론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권여선에겐 그게 전부다. 소설은 시종 상대의 비위를 건드리고 독자의 속을 긁는다. 그리곤 끝이다. 소설이라면 응당 기대할 법한 교훈이나 계몽, 감동 따위와 권여선은 관계가 없다.

책을 내려놓은 다음에도 언짢고 불편한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가슴팍에 돌덩이 하나 얹어놓은 것 마냥 답답하고 찜찜하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소설은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뒤숭숭한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고 독후감을 전하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겹고 짜증스러운 악몽 같기를 바라고 썼습니다."

모든 작가가 권여선처럼 쓸 수는 없겠지만(써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에게 권여선이란 작가가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러므로 좋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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