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농후계자의 목멘 함성(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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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마지막 남은 생명줄인 쌀마저 수입한다면 우리 7백만 농민은 이제 어떻게 살아갑니까.』
13일 오후 1시30분 서울 을지로7가 동대문운동장앞. 구리빛 얼굴의 젊은 농민 2백여명이 「쌀시장 개방반대 전국농어민후계자 궐기대회」를 갖고 목청을 돋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국농업 파멸시키려는 쌀수입 개방압력 즉각 중단하라.』
『정부는 식량안보 최후의 보루인 쌀을 지켜내라.』
「쌀수입 결사반대」등의 구호가 적힌 머리띠와 어깨띠를 매고 플래카드를 든 농민들의 분노어린 함성은 갈수록 커졌다.
이들이 상경투쟁길에 오른 것은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 대표가 APEC회의 참석차 내한하면서 「예외없는 시장개방원칙」을 강조하고 쌀수입 개방압력을 가해왔기 때문.
농민들은 이른 새벽부터 집회장소인 장충단공원으로 몰려왔지만 미신고집회라는 이유로 입구에서부터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되고 말았다.
농민들이 이곳을 집회장소로 선택한 것은 APEC회의가 인근 호텔신라에서 열리고 있어 집회후 그곳으로 옮겨가 침묵시위를 벌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집회신고가 없었을뿐만 아니라 집회목적인 쌀수입개방 반대문제와 APEC회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경찰의 억지설득과 원천봉쇄로 최소한의 의사표시 기회마저 잃은 농민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주위를 맴돌았다.
『어렵게 서울까지 왔는데 아무소리 못하고 내려갈수야 있습니까.』
오랜 시간동안 회의장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농민들은 몇몇 사람들의 제의로 동대문운동장앞으로 장소를 옮겼던 것.
마침 오후 2시30분쯤 축구응원을 마치고 나온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해 함께 구호를 외쳤다.
『남들이 도시로 떠날때 우리는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농촌을 지켰는데 이젠 더이상 버틸 힘이 없어요.』
경찰의 종용으로 해산하면서 어깨를 늘어뜨린 농민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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