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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모개(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왕조왕하는 요즈음의 정부정책 난맥상은 「조령모개」란 옛 교사를 새삼 실감케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외국어중학교 설립인가를 이틀만에 취소했다. 이유인즉 다른 사립학교들의 거센 반발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달초부터 시행하겠다던 경인·경수고속도로의 승용차 통행제한도 백지화돼 버렸다. 산업대 개혁안과 노동법 개정추진도 철회됐다. 제주도 개발특별법 제정은 갈피를 잡지 못한채 표류중이다. 모두가 이해관련자들의 반발에 부닥친 전근대적인 「탁상행정」의 좌절이다.
조령모개란 말은 한나라 문제때 어사대부(부총리) ●조가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침에 내린 법령을 저녁에 뜯어고치는 잦은 법령의 제정이나 개정은 백성의 신뢰를 떨어뜨릴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므로 삼가야 한다는 얘기다.
『오늘날 조정의 법령이 너무 쉽게 바뀌므로 관리는 법을 고수할줄 모르고 백성도 무엇을 따라야할지 모릅니다. 법령이 반포되면 모든 사람이 「이 법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하는데 과연 얼마 안돼 바뀌고마니 호령을 불신하는 풍조가 뿌리 깊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호령을 내리고자 할때는 반드시 옳고 그름을 잘 살펴 확고한 뜻이 선 후에 결정하면 망령되지 않고 아랫사람이 반드시 따라 시행할 것입니다.』
조선조때 연산군에게 올린 작자미상의 한 상소문 내용이다.
천하를 「짐」의 것으로 제압하던 전제군주하의 왕정시절에도 령을 세우는데는 사전의 충분한 통찰을 근본으로 삼았다.
민주시대로 들어와서는 이러한 통찰을 「현장행정」「확인행정」이 대신하고 있다. 물론 대의제도등을 통한 여론수렴이라는 절차도 거쳐야 한다.
아시아의 네마리 용중 1인당 국민소득 1만3천달러에 일본다음으로 잘사는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 것은 다름아닌 국민들의 「정부정책신뢰」였다.
싱가포르정부의 일관된 경제정책과 비전제시는 언제나 그 확고한 정책의지를 국민들이 믿고 따른다.
강한 정부는 권위주의고 민주정부는 약체정권일 수 밖에 없다는 그릇된 정치풍토의 고질을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개발독재 시대를 지향하는 향수가 결코 아니다. 과거 관행은 의심을 받고,그렇다고 새로운 합의도 이룩해내지 못한 오늘의 현실만을 더이상 탓할때가 아니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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