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어선은 현대판 「노예선」”/피해자들이 폭로한 선상폭력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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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구인광고에 속아 승선/“힘들다” 하소연에 상급자 몰려와 구타/고기안잡히면 “기합빠졌다” 구실 뭇매
전국 선원피해자협의회가 펴낸 보고서 『현대판 노예선』은 선원들이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 원양어선을 타는 순간에서부터 노예나 다름없는 선상생활을 하면서 상급선원에게 무차별폭행을 당하는 선상폭력의 실상과 이만행을 방조·묵인하는 선주 및 관련 기관에 대한 분노 등을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다.
『현대판 노예선』피해사례 6건 가운데 2건을 소개한다.
◆『처절한 「독재공화국」의 악몽』(전국선원피해자 협의회위원장 황경연씨의 고발)=91년 3월28일 「주택구입융자 2천2백만원,연봉 1천만원이상」이란 스포츠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서울 용산역 주변에 있는 「시코」라는 선원소개업소를 통해 부산선적 북양오징어유자망어선 제7금도호를 타게 됐다.
4월10일 부산항을 출항,배가 오륙도를 지나자 그동안 친절하기만하던 갑판장 신모씨의 폭언이 시작됐다.
『개××들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14일 저녁 건조한지 30년이 지난 낡은 배가 기관고장을 일으켜 부산으로 회항하는데 15일 새벽 계속된 갑판장의 호통에 겁먹은 김용복·김진희씨가 부산외항에서 탈출해 버렸으며,15일 오전 9시45분 부산항을 재출항했다.
16일부터 어망을 연결하는 작업이 시작되자 『일하기에 불편하니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것이 좋다』며 하급선원들의 머리를 삭발해 버렸다.
17일부터 폭행이 시작되었다. 양병국씨는 그물연결작업을 하다 작업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그물아바(노란색깔의 부이)로 수십차례 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 올랐다.
23일 『일을 잘못한다』고 온몸을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피멍이 들었고,24일 새벽엔 그물 끌어 올리는 작업중 작업속도가 늦다는 이유로 나를 비롯한 첫승선자 10여명이 3명의 상급선원들로부터 대나무 막대기로 10여차례씩 폭행을 당했다.
5월1일 새벽 정모씨에게 『힘들어서 선상생활을 못하겠다』고 하소연한 것이 화근이돼 점심식사후 식당에서 갑판장 신씨가 『집에 가고 싶은 놈은 죽여도 괜찮다』고 하자 김모·조모씨가 넘어 뜨려 놓고 무자비하게 발로 밟았다. 얼굴에서 선혈이 낭자해졌고 이가 세개나 흔들거렸다. 또 소주병으로 머리를 맞아 병도 머리도 모두 깨지고 터져 정신이 혼미해졌다.
5월7일 고기가 잘잡히지 않아 선미에서 쉬고 있던 동료선원을 김모씨가 『기합이 빠졌다』며 팬티까지 벗긴채 대나무로 마구 폭행했다. 동료선원 입에서는 『잘하겠습니다』라는 외침이 목이 터져라 나왔다. 비명소리를 선장이 못들었을리 없는데 선장은 나와보지도 않았다.
5월9일 조모씨가 선수에서 그물에 걸려온 오징어를 『입으로 물어 따라』고 지시,5월1일 폭행당할때 흔들거리던 이 하나가 그물에 걸려 빠져 버렸으며 다음날엔 역시 조씨로부터 바늘대를 잘못관리한다는 이유로 매를 20대나 맞았으며,20일엔 사단(그물을 잘라내는 작업)을 하던중 그물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씨로부터 무쇠칼로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는등 거의 매일 상사로부터 폭행당했다.
7월9일 가장 인간적이던 기관장에게 하소연,그의 주선으로 지옥같은 노예선을 벗어나 운반선 77동방호 편으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노예선이었습니다』(부산선적 유자망어선 제1동보호 선원 이승훈씨(35)의 지난 9월28일 국회내무위 부산시경찰청 국정감사참고인진술)=신문광고를 보고 부산의 해원물산을 찾아가 제1동보호 항해사를 만나 지난 5월1일 배를 탔다.
5월7일 북태평양으로 항해중 사관 오모씨(23)가 욕지거리를 하면서 얼굴을 주먹으로 구타해 대들었으나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저녁 전종수씨(34)가 비상식량과 구명대를 챙겨 탈출하려다 적발돼 항해사에게 무차별구타를 당했다. 8일 몸이 아파 침실에 누워 있는데 항해사가 『왜 일을 안하느냐』며 장기판으로 머리를 때려 탈출하기로 결심,9일 새벽 태평양바다에 투신했으나 1갑판원 한정수씨에 의해 구조돼 항해사로부터 투망대로 또 맞았다.
이날 막내선원인 이호진군(19)이 부모에게 보낼 지옥같은 선상생활상을 담은 편지를 쓰다가 항해사에게 적발돼 무수히 구타당한뒤 칼로 동맥을 끊어 자살하려다 오장욱씨에게 들켜 『칼로 죽으나 나한테 맞아 죽으나 같으니 맞아죽어라』며 대나무로 두들겨 맞는데 차마 눈뜨고 못볼 지경이었다.
이군은 이날 갑판에서 손과 발이 밧줄에 묶인채 오징어를 입에 물고 3∼4시간동안 갑판장·1갑판원들에게 번갈아 가며 삽밀대·대나무 몽둥이로 폭행당해 초주검상태가 됐으나 선장등 사관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5월중순부터 석창대씨등 5∼6명이 선상반란을 일으켜 배를 부산으로 회항시키기로 결의했으나 19일 석씨가 양망작업중 실종되는 바람에 선상반란을 포기했으며 계속폭행을 당하다가 8월20일 건강악화를 핑계로 제1동보호를 하선했다.<부산=강진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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