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기적 사회자정운동 있어야(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강남의 주부들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꼴을 보기 싫었다. 평소 잘사는 사람을 보면 크게 한탕해서 큰 돈을 벌고 싶었다.』 대낮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주부를 납치한 뒤 가족에게 1억5천만원을 요구하다 잡힌 범인의 태연스런 말이다.
『촌놈이라는 말에 화가 치밀어 불을 질렀다.』 10여명을 떼죽음으로 몰았던 대구 나이트클럽 방화범의 뜻밖의 범의 진술이다. 『혼자 죽기가 억울해서 여러명과 함께 죽기로 했다.』 2명의 어린이를 숨지게 하고 20여명을 다치게한 여의도광장 자동차 질주사건의 범인이 내뱉은 말이다.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끔찍스런 사건들을 보면서 나 자신 언제,어디서,어떤 횡액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살인·범죄·방화가 인과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로 가하는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공포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단지 나이트클럽에 갔다는 이유만으로,여의도 광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범인의 자동차옆에 주차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에 타 죽어야 하고,자동차에 깔려 죽어야 하며,자동차 트렁크속에서 21시간의 살인 공포를 맛봐야 하는 기막힌 세태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먼저 이들 세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특징을 꼽는다면,가진 사람에 대한 잠재적 분노의 충동적 발산이다. 잘 사는 강남 주부에 대한 분노,잘 사는 도시인에 대한 영농 실패 농민의 분노,공장을 전전하며 신체적 부자유에 좌절감을 느낀 청년의 잘 살고 건강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살인과 범행의 충동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정상적 삶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이 갖는 분노의 충동요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탕주의 유괴사건이나 충동 살인사건으로 분출된다는 사실이 최근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두번째 특징이라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적 분석에 따른다면 이러한 사회병리현상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행과정속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사회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외계층의 무차별한 분노와 충동살인을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이고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것인가.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 의한 산업화와 시민적 자율과 질서를 주축으로 하는 민주화를 시대적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더이상 후퇴할 수도,늦출 수도 없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수용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일탈하고 멀어져 가는 계층을 극소화하고,그들의 분노를 완화하는 장치를 모색하는 길이 바로 당면한 사회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멀고도 가까운 길이라고 판단한다.
이를 위해선 첫째,잘사는 사람 또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부정과 비리의 대표주자가 아니라 공정한 룰과 개개인의 부단한 노력에 따라 오늘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본보기를 부단히 보여야 할 것이다.
사회지도층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확보된다면 소시민과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도 줄어들 것이고 사회의 틀이 자신에게만 불리하게 짜여져 있다는 분노도 사그러질 수 있다고 본다.
둘째,민주화의 기본틀은 개개인의 엄정한 도덕성과 자율에서 출발하고,그것이 사회를 맑고 윤택하게 하는 지렛대임을 확인하는 도덕성의 회복이 사회운동과 교육을 통해서 거듭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틀이 잘못 짜여져,또는 사회지도층의 비리가 성행하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부정과 비리에 한몫 거든다는 발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질책하고 타이르는 관행이 가정과 학교에서,그리고 사회 구석마다 실시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소외된 삶이란 사회 지도층이나 잘못된 사회의 틀 탓이 아니라 자신의 나태함과 무능이 자초한 결과라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풍조를 확립해야 한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어쩌다 일어나는 염기적 사건으로 방치할 일이 아니라고 보고 정부가 벌이는 새생활 새질서 운동이라는 전시적 캠페인만으로 치유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의 병리구조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사회경제적 대책이 정부의 정책과 민간단체의 운동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전개되어야 할 화급한 시점이라고 우리는 판단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