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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내다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그래서 국가중심을 대전·장기를 핵으로해 중부권으로 옮기자는 거였죠. 그러면 전국이2∼3시간 생활권이 되잖아요.
서산앞바다 가노림만을 개발해 인천보다 큰 항구도 만들고 대규모 공업단지군을 세우고요. 그래서 정부부처에서 이곳에 조수발전소를 짓겠다는 것도 막았었지요. 청주 군비행장부지도 넉넉하게 사두고요.』
꿈은 그러나 역시 꿈이 되어버렸다. 보랏빛깔 신수도 구상안은 지금 몇몇군데 도서관창고 먼지속에 묻혀있다. 「백지계획」은 그동안 어떤 길을 걸었는지 따라가 보자.
먼저 김정렴·오원철씨등 3공 그룹은 『10·26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신수도가 들어섰을 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5공, 6공이 신수도에 그다지 관심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김·오씨 말이 반드시 맞는것 같지도 않다.
79년들어 국가경영기력이 부쩍 쇠잔해진 박대통령자신이 주춤했다는 증언이 있다.
물론 포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
기획단관계자 K씨의 분석.
『79년들어 추진력이 떨어진 것만큼은 사실이에요. 여러가지가 겹쳤었죠. 카터가 미군을 철수한다고 해서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물가도 오르고 경제도 흔들려 신수도같이 엄청난 투자를 생각할수 없었죠.
분명히 계획이 유보되는 분위기였어요. 기획단은 신수도를 생각해 과천청사건립을 반대했지만 결국 강행됐잖아요.
그렇다고 포기는 아니에요. 몇년 늦어졌겠지만 나는 결국 신수도는 시작됐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데 10·26이 터진거예요. 기획단은 1년 가까이 유지되다가 80년9월 해체됐어요.
30여권짜리 「백지계획」은 건설부·KIST·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도서관에 1세트씩 보관용으로 보내졌고요.』
5공은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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