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와인포차' 젊음의 거리 휩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제 소주는 버겁더라고요."

소주는 버겁다. 와인은 어렵다. 소주가 버거워지는 나이, 와인이라고는 마주앙 밖에 모르는 당신을 위해 여기 와인포차(포장마차)가 있다. 이곳에서는 샤토, 카베르네 소비뇽, 부르고뉴 등의 어려운 고유명사는 영원히 몰라도 그만이다.

◇젊음의 거리 휩쓴 와인포차=2호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내려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곳곳에 이색 선술집이 눈에 띈다. 생긴 것은 대학가의 여느 포장마차, 분식집, 혹은 생맥주집과 다를 바 없는데 가게 앞에는 빈 와인병과 코르크 마개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바로 '와인포차'로 불리는 와인가게들이다. 지난해부터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골목마다 두 개 이상씩은 자리 잡았다. 미술학원 거리로 불리던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대 정문앞 길은 한 줄로 이어 있는 와인포차 '엘모'와 '얌전한 고양이', '프리하트'등의 인기에 '와인포차길'로 불리기도 한다.

압구정 일대도 비슷한 분위기다. '까나페 아일랜드', '올리브 트리'등 와인포차가 인터넷 와인 동호회를 중심으로 인기다. 홍대 앞에서 와인포차를 운영하는 최미란(36)씨는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는 소주가 버거워졌다"며 "와인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선술집 형태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편안한 분위기, 착한 가격=선술집 형태 와인주점 분위기는 말 그대로 '포차'. 편안하고 구수하다. '은은한 조명, 잔잔한 음악, 격조 높은 고객들' 같이 소위 젠체하는 느낌의 기존 와인바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충 놓은 의자와 테이블, 편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어서 언제든 말을 걸 수 있는 주인 등 우아하고 어려운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런 편안한 분위기는, 높은 인테리어 비용 때문에 통상 5억원 이상은 있어야 창업할 수 있었던 기존의 와인바 창업에 관한 통념도 깼다. 손님도 가지각색이다. 힙합 대학생부터 넥타이 40대, 다정한 연인들까지.

편안한 분위기 조성에는 친절한 메뉴판도 한몫했다. 커다란 메뉴판에는 손님의 취향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자세한 설명들이 또박또박 쓰여있다. 우리말로 자세하게 설명돼있는 이들 메뉴판은 외국어 일색의 기존 와인 리스트와는 개념부터 다르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설명 뒤에는 사뭇 '착한' 가격이 붙어있다. 홍대 앞 '얌전한 고양이'에는 6000원짜리 1인용 와인부터 1 ̄2만원대 저렴한 와인들이 준비돼 있다. 대부분 기존 와인바에서 5 ̄7만원에 판매되는 것들이다.

안주도 싸다. 대부분 만원 이하이고 가장 비싸다는 치즈 모듬이 1만 5000원. 크림 치즈와 과자로 구성된 기본안주도 푸짐하기 때문에 굳이 안주를 주문할 필요도 없다. 서초동의 와인포차 '올리브트리'에서는 자장면 안주도 있다. 식사를 못한 고객을 위해 가게에서 준비한 것. 올리브트리 이동수(27) 사장은 "부담없이 들러서 소주 마시듯 마실 수 있는 와인가게로 자리 잡고 싶다"고 했다.

속칭 '좀 아는 사람들'이 찾는 와인바와 달리 와인포차에서는 비프랑스계 와인이 주류다. 호주,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일명 비프랑스계 와인은 값도 싸지만, 단맛과 향을 지니고 있어 초보자들이 즐기기에 좋다. 와인 수입국가가 다변화되면서 가격이 떨어지고 이를 통해 와인 소비층이 넓어져 와인 소비 공간이 다양화된 셈이다.

직장동료와 와인포차를 즐겨 찾는다는 이민규(29)씨는 "가격도 부담 없고, 천천히 대화를 하면서 마시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돼 회식은 주로 이곳에서 한다"며 "주말엔 가족들과도 와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 와인 1세대로 꼽히는 한국와인협회 서한정(64) 회장은 "와인 문화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소수 전문가에서 대중으로 확산되는 추세"라며 "초보자는 저렴하고 심플한 와인을 편하게 접하면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와인포차의 등장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여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