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험서 배우는 「공명」지혜(성병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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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한 정당의 선거연락소로 둔갑한 읍내 곳곳의 선술집에선 매일 저녁 선거민 초대연이 벌어진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공짜. 별실에서는 초대된 유권자 개별면담이 진행된다. 도와줄 일을 묻는 후보자 대리인을 상대로 지난번 선거에선 얼마를 받았고 상대정당에서는 얼마를 준다고 하니 얼마를 내면 표를 주겠다는 식의 노골적 흥정이 오간다.
밤이 되면 외지에서 고용되어온 「달세계 사람」이란 낯선 운동원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유권자들의 집을 찾아 한표를 부탁하며 금품을 건네준다.
○별실에선 매표흥정
이런 은밀한 매표행위 외에도 수많은 선거구민을 운동원으로 고용해 공개적으로 돈을 준다. 온통 선거구를 당기로 뒤덮기로 하면 깃발제작,깃대제작,깃대 세우는 일,상대당으로부터 깃발을 지켜주는 일 등에 수많은 유권자를 고용하고 시가의 몇배되는 후한 보수를 주는 식이다.
1백10여년전 영국 샌드위치의 선거풍경이다. 1880년 영국 총선직후 행해진 8개 선거구에 대한 선거부패조사보고를 보면 이 지역의 부패양상은 시쳇말로 「총체부패」였던 모양이다. 후보측의 금품제공을 거절한 유권자가 전체선거구에서 불과 두명 뿐이었다는 것이다.
의회제도를 창안한 영국도 19세기까지는 이렇게 선거의 부패·타락으로 병들어 있었다. 1844년 최초로 매표행위가 보편적이었던 서드베리선거구를 「부패시읍」(Rotten borough)으로 규정,선거구해체란 극약처방까지 하는 등의 부패방지대책을 수차례 강구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1870년 「부패시읍」으로 판정돼 선거구특권이 박탈된 아일랜드 카셸에서 나돈 우스갯소리는 당시의 보편화된 선거부패상을 잘 말해준다.
한표에 20파운드가 오가는 매표풍조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은 후보가 교구목사에게 매표의 반윤리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부탁했다. 목사는 주일예배때 『표를 판다든지 해서 정치를 타락시키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제 효과가 좀 있겠거니 한 후보가 교인유권자를 만났다. 그랬더니 그 유권자는 『지금까진 20파운드를 받았지만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하니 이제부턴 40파운드는 받아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1백여년전 남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횡행하고 있다. 금년에 있었던 두차례의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2조원 이상의 돈이 풀렸다고 한다. 하도 단가를 올려놓아 14대총선에선 후보당 수십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리라는 얘기가 정계에 나돌 정도다.
내년에는 네차례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선거때마다 이런 식으로 돈이 풀리고 사회기강이 해이해지다간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경제가 거덜날까 걱정이다.
그런데도 우리정치는 문제의식조차 없어 보인다. 여야의 선거법협상에선 선거부패추방,돈 안쓰는 선거같은 시급한 과제가 뒤로 밀리고 정치부패의 한 전형이랄 수 있는 전국구후보 헌금의 합법화같은 것이 오히려 중심문제로 논의되고 있다니 말이다.
지금은 나라를 망칠지도 모를 선거부패의 병소를 도려낼 방안을 시급히 찾아내야할 때지,부패자금의 합법화를 노래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영국에선 대표적인 부패선거구 11개를 해체하는 대수술과 1883년의 강력한 「부패 및 위법행위 방지법」의 제정·시행으로 그 극심했던 선거부패의 기를 꺾었다.
○경제 탈날까 걱정
새 법은 부패 및 위법행위의 처벌강화,위반자의 광범한 선거권 및 피선자격 박탈,대리인의 위법행위가 후보자에게 미치는 연좌제도입,선거비용의 철저한 제한 및 관리를 골간으로 하고 있다.
후보자는 스스로 또는 승인하에 금품제공등 부패행위를 한 경우 영구히,기타 위법행위를 한 경우 당선무효와 함께 7년간 하원의원 피선자격을 잃는다. 후보자가 몰랐던 경우라도 그 대리인이 부패행위를 하면 7년,기타 위법행위를 하면 당해 하원의원 임기동안 같은 처벌을 받는다.
유급 선거운동원은 1명의 사무장,투표구마다 각 1명씩의 부사무장 및 투표참관인 등으로 제한됐다.
이들은 후보자로부터 보수를 받기때문에 그 선거구에서는 투표권이 상실된다. 또한 선거에 관한 소송은 계속적인 심리로 단시일안에 끝내도록 강제규정을 두어 위법행위를 하고도 장기간 의석을 유지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
이 법이 시행된 후 영국정치에서 선거부패는 정치생명을 거는 자살행위란 인식이 뿌리내렸다. 국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겹쳐 이 강력한 법은 영국정치에서 선거부패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우리 선거법에도 선거부패를 막는 조항은 적지 않다. 연좌제도 있고,선거비용제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법규정이 철저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치인과 국민일반의 선거부패 근절의지가 희박한게 문제다.
○전국민 각성도 중요
선거법 협상의 최우선 과제는 선거법위반이 정치생명을 끊는 자살행위란 생각이 번쩍 들 정도로 과감한 법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대리인의 부패·위법행위에 후보자가 책임을 지는 연좌제를 확대·강화하고 선거재판을 최우선적으로 신속처리토록해 위반자가 즉각 불이익을 당하는 체제를 만드는게 중요하다.
선거부패는 정치권과 국민의 합작품이다. 정치권의 정화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국민일반의 각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투표가 후보자의 주머니를 털 수 있는 기회라는 의식이 백성들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한 정치부패는 백년하청일 수 밖에 없다.<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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