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두 이 비극의 공범/정진홍 서울대교수·종교학(초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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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음으로 돌파구를 찾는 병든 문화/통곡조차 할수없는 부끄러운 폐허
사람 사는 세상에 기막힌 일이 어디 한둘이랴만,지난번 대구에서 있은 참사나 여의도에서 일어난 비극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이런 저런 소리 다 그만두고,그 가족이나 부모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라고 생각해 보자. 그 「까닭 없는」 죽음을 어떻게 통곡하고,어떻게 설명하고,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을 쥐어 뜯고,아무리 땅을 굴러도,그러다 하늘을 향해 분노와 원망의 몸짓을 지치도록 절규한들 그 아픔이 어찌 삭여질 수 있을 것인가.
○까닭없는 죽음
그러나 우리의 기막힘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른바 범인이라는 두 젊은이. 물론 우리는 그들에 대한 분노를 감출 필요는 없다. 그 못된 인간에게 연민을 베풀지 않아도 좋다. 살인범이니까,그것도 「까닭없는」 살인을 자행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들도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그들의 아픔 또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혈연의 정은 그 어느 것으로도 끊기 어려울텐데,그들이 내 자식이고,내 아우라고 생각해 보자. 드러내놓고 통곡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움 속에서 하늘이 무너진 폐허를 가슴 가득히 안으며,자학에 자학을 거듭해도 풀리지 않을 한을 어떻게 설명하고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막힘은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어처구니 없는 기막힘이지만 그대로 일상일 수 있다. 이미 벌어진 일,그래서 분노하고,절규하고,통곡하고,자학하면서 세월이 흐르면 비록 상흔이 깊어도 잊을 수조차 있는 일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또다른 기막힘이 있다. 그것은 그 두 젊은이의 표정과 발언에서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음이다.
우리는 그 죽음이 「까닭없음」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발언하고 있지 않다. 그 하나 하나의 죽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행위 자체는 결코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까닭이 있음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멸시에의 분노,혼자 죽기에는 너무 억울함이 그 까닭으로 펼쳐지면서 자기 정당화의 자리에 스스로 서고 있는 것이다.
○이 기막힌 현실
이런 논리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일상일 수 없는 비일상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일상적인 일이 엄연한 현실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이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자리를 바꾸어 내가 그들이라고 해보자. 돈 없어 당하는 철저한 소외,가난을 못이긴 아버지의 자살,그렇게 내가 그자리에서 상념을 이어 나가다 나도 모르게 「오죽하면」하는 계기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굴절이 스물대고 그때 겨우 깜짝 놀라 「이런 어처구니없게 공감하고 있다니」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이 비일상에 대한 기막힘. 우리는 이사실을 전혀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이번 일들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일련의 흐름,곧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림으로써 삶의 막힘을 뚫어가려는 병든 죽음문화,그 기막힌 죽음의 미학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객일 수가 없다. 우리들 누구나 그 죽음문화의 주역인 것이다. 까닭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곧 나고,그 죽음을 통곡하는 것도 나며,그 죽음을 빚은 사람들의가족도 나고,그 살인자도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하기야 우리는 쉽게 이 사건을 진단하고,분석하고,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그릇되고 정의롭지 못한 체제나 구조,그것이 빚는 광기같은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정의의 큰 소리로 질타하는 것이 그런 것이고,건강한 인성의 성숙을 스스로 기하지 않은 게으르고 무사려한 본능적 충동의 노예가 된 참담한 인격에 대한 질타가 그런 것이다. 그러한 인식이나 판단,질타나 처방은 하나도 그르지 않다. 당연하게 체제나 구조는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더 있을 수 없는 현실적인 혁신을 서둘러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3백50만원짜리 투피스가 버젓이 팔리는 세상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이러한 사건이 더 없으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또한 체제가 아무리 바뀌고 구조가 혁신되어도 여전히 남아있을 인간성의 문제,그 야수성과 파괴본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이른바 도덕적 각성이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면 또다른 「대구방화」나 「여의도 살인질주」가 가셔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총체적 참회를
그러나 이런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것은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는 분명한 인식임에는 틀림없지만,동시에 자기면책의 기교를 내밀하게 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 허위의식의 뿌리는 그처럼 깊다. 그렇다고 해서 「내 탓이오」를 주문처럼 외자는 것도 아니다. 까닭없는 죽음과 까닭있는 죽음을 한데 지양할 수 있는 길은 그 죽음과 죽임에의 참여,곧 그 비극에의 동참과 그 범죄에의 공범의식이다.
가을,그 찬란한 하늘 아래에서 찌그러진 세발 자전거의 잔해를 현실로 살아야 하는 이 기막힘,이제 바야흐로 우리는 총체적 참회를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도 사람인데,언제까지나 이 기막힘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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