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봉쇄 당한 고문사례 발표·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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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7년은 새해 벽두부터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국이 급박한 긴장감과 혼란에 휩싸였다.
국민들의 경악과 분노가 치솟는 만큼 이를 경계하고 짓누르려는 당국의 탄압은 그 심도를 더해갔다.
그해 2욀7일 박군의 49제를 계기로 민미협은 운영위원회를 열고 고문근절과 인권회복을 주제로 한 대규모 기획전을 열기로 했다. 전시회의 이름은 「반고문전」으로 정했다.
민중미술계가 이처럼 조직적이고 투쟁적 성격의 전시회를 마련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의 억압적 사회상황으로 볼 때 개최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민미협은 「반고문전」을 3월10일부터 23일까지 그림마당 민에서 열기로 하고 회원들에게 출품요청 공문을 보냈다.
민미협은 전시회에 즈음한 성명서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할 국가권력이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생명을 조직적이고 상습적으로 유린하고 있다면 그 권력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행사』 라고 강조하면서 인권회복과 고문근절을 주제로 한 「반고문전」에 모든 미술인들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반고문전」 의 출품작가들은 당시 이름 있는 민중 미술작가들이 총 망라 되다시피 했다. 신학철·주재환·김정헌·임옥상·여운·이철수·강요배·박불똥·안창홍·최민화씨 등 30명이 참가했다.
『그 동안의 민중미술 전시회가 사회에 민중미술을 알리고 소개하는 차원이었는데 비해 「반고문전」은 민중미술작가들이 역량을 모아 처음으로 정권에 정면 대응하는 조직적인 전시회였습니다. 더욱이 시대적 상황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요. 당시 이 전시회를 추진했던 홍선웅씨 (당시 35세·민미협 사무국장)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리들 자신도 연행돼 고문을 당할지 모른다는 긴박감이 감돌았다』고 회상했다.
민미협은 전시회와 함께 고문사례 발표 및 황인철 변호사의 강연도 갖기로 했다.
전시회 첫날인 3월10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 주변도로에는 전경들이 쫙 깔리고 형사 10여명이 전시장안으로 찾아들었다.
이들은 전시장에 이미 걸려있던 출품작 가운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전경들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담은 박불똥씨의『불법 연행』과 박종철 군의 영정을 앞세우고 시위하는 군중을 그린 서재붕씨의 『침묵시위』 등 3점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예술작품입니다. 미국 같은데서는 정치적 이슈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어요. 레이건 얼굴도 자주 희화하잖아요. 『그러면 미국가서 살면 되잖아. 여긴 한국이야』
홍씨를 비롯한 민미협 간부들과 경찰은 한참동안 『떼라』 『못 뗀다』고 승강이를 벌였다. 민미협측은 철거요구 작품가운데 가장 민감한 내용의 『불법연행』을 떼어 사무실에 두었고 경찰은 더 이상 강압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시회와 함께 열리려던 고문사례 발표 및 강연은 결국 원천봉쇄 당하고 말았다.
14일(토요일) 아침부터 전시장 주변엔 전경 3개중대가 배치되고 경찰은 오후 5시에 열릴 예정인 두 행사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경찰은 이날 비로소 전시장을 봉쇄했다. 이 때문에 작가 및 민미협회원, 관람객 등 1백여 명은 전시장을 가로막아선 경찰과 대치하며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당초 행사가 열리려던 오후 5시가 되자 홍씨는 큰길가에서 준비했던 성명서를 낭독했으나 도중에 경찰에 의해 중단되고 강제로 연행됐다.
경찰은 이이 항의하던 민미협 회원 5명과 일반시민 1명도 닭장차에 밀어 넣고 끌어갔다.
민미협 회원 10여명은 함께 있던 민문협·민족문학작가회의·민교협회원 등과 함께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경찰은 이날 밤 연행자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이 같은 사태가 없을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원천봉쇄사건은 며칠 후 다시 터졌다.
17일 오후 그림마당 민에서는 미술평론가 원동석씨가 국내외의 인권탄압과 고문실태를 슬라이드를 통해 강연할 예정이었다.
경찰은 오후 1시쯤부터 사복경찰 1백여명을 전시장주변에 배치, 출입을 봉쇄하고 이를 항의하던 홍씨 등 민미협 회원 4명을 다시 연행했다.
이때도 경찰은 슬라이드 강연중단이 이뤄지자 밤늦게 연행자 전원을 풀어주었다.
14일의 원천봉쇄사건은 이튿날 모일간지에 심한 몸싸움사진과 함께 간략한 기사로 보도되었으나 지방판에는 빠지고 말았다.
「반고문전」은 이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서울전시에 이어 그해 25일부터 5월27일까지 전주·이리·목포·광주·원주·부산·인천 등 7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됐다.
80년대는 「민중미술의 시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술사적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같은 「미술의 사회참여」 운동은 지금도 그 열기가 식지 않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 운동방식과 표현내용이 점차 변해가고 있다.
민중미술운동의 기폭제였던「현실과 발언」이 지난해 창립 10주년 기념전을 즈음해 해체를 공식 선언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었다. <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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