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업 설자리가 없다|구멍 뚫린 유통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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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진로유통이 지난달 초 서울서초동 l8층짜리 매장건물 간판을 「진로도매센터」에서 「진로유통센터」로 바꿔 달았다.
도매업 면허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올해 소매율이 95%에 이르러 소매업자나 다름없게 된 진로유통이 더 이상 도매업 간판을 고집할 필요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88년1월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도매센터로 출발했던 진로도매센터가 3년여만에 간판에서 「도매」자를 떼야 했던 속사정은 현재 우리 나라 도매업의 초라한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른바 「무자료거래」의 벽이 너무 두꺼웠습니다. 덤핑물건에 익숙해 있는 소매상들이 과표가 그대로 노출되는 도매센터와의 거래를 좋아할 까닭이 없지요.』
진로유통 김정인 기획관리실장의 말이다.
진로유통은 무자료거래의 기존 상관행 때문에 도매로서는 채산을 맞출 수 없어 기존의 입점 영세도매상들을 내보내고 소매상으로 대체하는 쓰라린 「물갈이」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조업자와 유통업자가 한통속이 돼 계산서를 주고받지 않는 무자료거래 관행은 우리 유통업계가 국제화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뛰어넘지 않으면 안될 거대한 장벽으로 남아 있다.
무자료거래는 소매상뿐만 아니라 제조업자들 사이에서도 성행되고 있다.
현재 서울의 모래내·청량리·영등포 등에는 공장에서 막 나온 비누·치약 등 생활필수품이나 인기 없는 양주 등이 30∼40% 싼값에 덤핑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판매경쟁이 치열한 생필품 중 일부 품목의 제조업체들이 소화하지도 못할 물량을 과다하게 생산해 결국 「밀어내기」로 출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덤핑상품 중에는 세무서의 부가가치세 장부에 오르지 않은 탈세목적의「지하상품」들이 5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강이북 경기지역으로 보내지는 모래내 시장물건의 경우 유명메이커의 치약·비누 등 생필품이 「떨이」식으로 무게를 달아 출고되고 있을 정도다.
국세청 부가세과 김창환 사무관은 『수시로 업체의 거래장부를 추적, 무자료거래를 단속하고 있지만 일손이 달리는 데다 워낙 뿌리깊은 상관행이어서 근절되지 않고 있다』면서 『거래업체간의 영수증 주고받기가 정착되지 않는 한 덤핑시장에 무자료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관행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1일 제2단계 유통시장개방(3백평 미만·10개 매장 설치 허용)이후 미국 다이얼·허드슨 커머셜사, 일본 유니언통신, 스위스 코카콜라·네슬레사 등 l2개(8월말 현재)도매업체가 대한투자신청을 해놓고 있지만 상공부는 무자료관행 때문에 이들 업체들이 쉽사리 국내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상공부 한덕수 산업정책국장은 『실타래처럼 도·소매업이 얽혀 혼재 하는 데다 재고가 아닌 신제품이 곧바로 덤핑시장으로 직행하는 국내유통시장의 난맥상을 접하면 아마 외국업체들이 크게 당황할 것』이라며 『오히려 선진 도매업체들이라도 들어와 불모에 가까운 국내도매업을 일으켰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유통업계는 이같이 「진인장벽」이 될 정도로 국내도매업이 낙후된 원인을 제조업자들의 「패권주의」 탓으로 돌리는 시각도 있다.
한국 슈퍼마킷협동조합연합회 허종기전무는 『국내제조업체들이 제품력 향상을 통해 판매를 늘리기보다 안정적인 판매망을 확보, 손쉽게 시장을 지배하려는 오랜 습성 때문에 순수한 도매업이 설 땅이 그만큼 줄고있다』고 지적했다.
가전3사가 각각 자기상품만 배타적으로 파는 대리점을 운영한다거나 과자·생필품메이커가 자사보유의 용달차로 두메산골 구멍가게에까지 물건을 직접 배달하는 등 대메이커들이 도매기능까지 겸하는 현재의 유통관행에서 어떻게 순수한 도매업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허전무는『이처럼 제조업과 유통업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힘의 불균형 때문에 진노소주판매 등에서 나타나는 「끼워팔기」를 유통업자들이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조업체는 그들대로 유통업계에 할말이 많다.
대부분의 유통업체들이 물건만 갖다 진열해 놓으면 유통업이라는 식의 전근대적인 사고로 판매, 관리기법개발에 소홀한데다 자체유통전문인력을 양성하기보다는 다른 업체직원을 스카우트하는 등 스스로 주먹구구식 경영을 해왔다는 것이다.
82년 이후 지난8월까지 10년간 배출된 판매사는 모두 1만2천7백49명에 이르지만 업체들이 채용을 꺼려 취업률은 5%에 그치고있다.
제조업체 주도의 유통업 탈피, 전문유통인력의 양성 이외에도 국내에 도매업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대규모 물류 및 집배송센터의 건립이 필수적이다.
신세계백화점 강성득 동방플라자점장은 『물건이 대량으로 유입돼 대량으로 배출되는 물류단지와 집배송시스팀은 「물가」라는 수위를 조절하는 저수시와 같은 것』이라며 『첨단정보시스팀과 대형자동화창고, 효율적인 운송망이 결합된 물류시스팀은 매출증대·원가절감에 이어 제3의 이익창출원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현재 수도권에 8만l천평 규모(용인)의 집배송단지 건설계획을 세우고 설계용역을 마친 것을 비롯해 부산(2만4천평), 대구(5만평), 광주(5만평)등 전국주요도시에 4개의 대규모 물류단지 건설계획을 추진중이나 지가보상비가 수백억원에 이르는 등 막대하고 재정확보가 어려워 애로를 겪고있다.
이 때문에 전국중소상인연쇄점연합회 등 유통3단체는 차라리 자체적으로 부지를 확보해 서울근교에 수십만평의 자가 물류단지를 건립, 전국 수십만 도소매업회원업체들이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유통시설을 「생산에 따른 부대시설」로 간주, 여신 및 세제상 혜택을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유통업체 관계자들은 오는 93년 유통업 완전개방에 앞서 ▲무자료거래를 막기 위한 대책위원회 결성 ▲유통인력양성을 위한 전문기관설립 ▲물류센터 건립을 위한 부지확보 등 우리 유통업의 「진공상태」를 메우는 최소한의 준비작업만이라도 해 놓아야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홍승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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