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joins.com] 아버지의 '연애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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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원필씨(작은 사진)와 그의 가족들.

#1. 아들이 아비를 협박하다(2007년 2월 22일)

두 아들과 동네의 칼국수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TV에서 '불륜' 드라마가 방송됐다. "아이들 보면 안 되는 드라마잖아요?"라는 아내의 말에 맏아들인 충신(14.셋째)이가 "요즘 드라마는 전부 불륜.이혼 이야기"라고 했다. 막내 교신(8.다섯째)이도 거들었다. "아빠 주무실 때 봤는데, 골치아픈 사연이야." 허거걱~. 충신이가 지난해 음란사이트를 들락거렸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드라마 주인공은 너처럼 여자를 마구 바꾸지는 않잖아"라고 받아넘겼다. 갑자기 녀석의 눈에서 예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도 가만 있지 않겠어요. 할머니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과거 여자친구 이야기를 폭로하겠어요!" 그러자 바로 아내가 "할머니가 뭐라 하시든?"하며 궁금해 했다. 그때 식사가 나와 입을 다물었다. 귀가 후 식구들을 불렀다. "맏아들 놈에게서 협박당했다. 옛날 여자친구 비리를 폭로하겠다니 들어보자." 깜짝 놀란 충신이는 약간 기가 죽었다. 승리를 만끽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아버지가 여자친구 편지를 뜯어봤다고 한 달 동안이나 식구들과 말도 안하고 지냈대요." 나실(16.둘째)이가 소리를 질렀다. "야!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냐? 그걸 갖고 어떻게 아버지를 협박하느냐?" 내가 설명했다. "할머니가 인근에 사는 집사님 아들인 내 친구가 성탄절 때 찍은 사진을 넣어 보낸 편지를 본 뒤 통째로 버려 화가 났다. 그래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딸들은 "나라도 화났을 거야"라며 내 편이 됐다. 풀이 죽은 충신이를 보니 칼국수집에서 자신만만했던 표정이 생각났다. 부모가 자식에게 진짜 약점 잡힐 일을 하게 되면 자식들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약점 없는 부모가 되는 게 쉽진 않겠지만 자녀들을 위해 꼭 필요한 과업이리라.

#2. 12년 탄 차와 이별하던 날(1월 11일)

은빛 현대 엑센트는 우리집의 오랜 친구였다. 1994년부터 탔으니 12년이 넘었고 그 사이 라디오는 망가지고, 뒷 범퍼의 페인트는 거의 벗겨졌다. 유리창 올리는 게 중노동이고, 뒷문짝은 여닫을 때 삐걱 소리가 요란했다. 지난해 원경(11.넷째)이와 교신이를 데리고 경포대에 갔을 때 핸들이 약간 왼쪽으로 쏠리는 등 불안했다. 한달 뒤 아이 다섯을 태우고 안산의 은사님을 방문할 때는 핸들이 손에서 툭툭 튀듯 움직여 진땀을 흘렸다. 고심 끝에 폐차를 결정했다. 꽉 채워 놓았던 휘발유를 빼 이웃에게 주고자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넣기는 쉬워도 빼기는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과 함께 인근 할인점으로 쇼핑갈 때마다 차를 썼다. 폐차하기 이틀 전 이별을 예고하듯 날씨가 무척 추웠지만 한밤에 한강 둔치로 가 기념촬영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일곱 식구가 경포대나 서해 대부도 등에 갈 때 얼마나 시끌벅적 웃고 노래하고 까불고 다녔던지. 사고 한번 없이 순하게 잘 다녀줘 참 좋은 차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었다. 폐차하는 날, 차에 쇠사슬이 묶이고 덜컹 들려지는 순간 가슴 한켠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슬픈 이별이었다.

#3. 막내를 더 사랑하는 까닭은(1월 6일)

이 착한 아빠에게 큰 녀석들의 불만은 늘 아빠가 막내를 편애한다는 것이다. 난 짐짓 화가 난 듯 소리를 높인다. "배은망덕한 녀석들! 너희들 아기 때 얼마나 쭐쭐 빨며 사랑을 베풀었는지 알아? 사진 가져다 봐봐." 그 항변은 효과가 별로 없었다. 감기에 걸려 누워 있는 큰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넌 요즘 아빠가 별로 필요없지?"

"아니오."

"밥도 네가 해먹고 설거지도 하고 공부도 알아서 하잖아?"

"그건 그래요."

"솔직히 아빠가 안아주려 해도 징그럽지?"

"ㅋㅋ 맞아요."

"그러니 덜 사랑받는 거야. 막내가 이쁜 것은 잘 생겼거나,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라 지금 아빠를 많이 필요로 해서야."

큰 녀석이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궁색한 변명이나 합리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랑이야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정리=조인스닷컴 김동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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