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밤나무 숲서 연출한 환상의 무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경춘 국도변 밤나무 숲속 「토탈뮤제 무의자」에서 3일 밤 막을 올린 이색공연『왕자호동』첫 공연은 미술관에 전시된 고미술품처럼 고풍스럽고 고급스런 분위기에서 성황을 이뤘다.
경기도 미금시 평내동 「토탈뮤제 무의자」에는 공연시작 두 시간전인 5시30분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 부부 등 오랜 연극 팬들이 수소문해 찾아들었다. 공연장은 연극을 제작·연출한 무대미술가 이병복씨가 남편인 서양화가 권옥연씨와 함께 20여년간 고한옥과 고미술품 등을 사모아꾸민 개인미술관.
공연장으로 활용하고자 꿈꾸어온 이씨가 미술관에 어울리는 연극을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널찍한 숲속 공간 여기저기 들어선 고한옥과 곳곳에 널려있는 고미술품들이 어울려 2백년쯤은 거슬러 온 듯하다. 일찍 온 관객들은 주최측이 끓여주는 장터 국밥을 대접받고 한가로이 뜰을 거닐며 객석을 물색했다.
숲 속에 어둠이 완전히 내러 앉은 7시30분, 김덕수 사물놀이 패의 북소리와 징 소리를 신호로 공연이 시작됐다. 주최측이 넉넉히 잡아 예상했던 3백명을 3배나 넘는 9백여 관객은 미술관 중앙 연못 위에 가설된 객석에서 2백년 된 군산옥(군산에서 옮겨온 고한옥)의 미닫이문을 응시했다.
북소리가 잦아들면서 미닫이문이 열리고 고구려인 복장의 배우들이 일제히 대청마루로 나서 낙랑을 정복하고 개선하는 호동왕자를 맞는다.
이번 공연을 위해 출연중인 작품을 중단하고 온 박정자씨가 고구려 건국시조인 미몽에게 승전을 고하는 굿을 연기한다.
연못 위 가설무대에서 엄숙한 제의가 진행되는 동안 연못 주위의 가설조명이 사선의 빛을 모으고, 주위에 피어 오르는 모깃불·화롯불과 함께 열기는 더해갔다. 간간이 어둠을 가로지르는 반딧불과 조명에 따라 변색하는 버드나무도 훌륭한 무대장치로 빨려들었다.
제의 중 갑자기 고꾸라지다가 자세를 가다듬는 왕비. 미국유학도중 공연참가를 위해 일시 귀국한 윤석화가 눈빛을 번득이며『나는 낙랑공주입니다. 못다 한 말이 많아 따라왔소』라고 외친다. 『왕자호동』은 낙랑공주의 넋이 호동왕자의 계모인 왕비에게 씌워지는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호동은 왕비의 계교로 자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출발한 작가의 상상력은 왕비의 계략을 보다 구체화했다. 호동 대신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길 바라는 왕비는 낙랑공주의 넋인 듯 호동을 괴롭힌다. 결국『왕비를 탐한다』는 모략이 이어지고 호동은 자결한다.
이색적 무대에 맞춰 꾸며진 공연 역시 제의형식의 실험성을 보인다. 대사는 자제되고 넋을 향한 독백과 방백이 사용되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배우들의 코러스가 극 전체를 이끈다.
배우들이 군산옥 속으로 들어서며 조명이 사라지고 공연은 끝났다.
좀처럼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이병복씨가 박정자씨에게 불려나와 기쁨의 웃음과 눈물을 한꺼번에 참는 표정으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고 어둠 속에서 갈채가 이어졌다. 첫날 공연에는 박용구,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최창봉 MBC사장, 화가 천경자씨, 재일 동포 작가 이양지씨 외에 프랑스인·일본인 등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