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65. 여배우 최은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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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55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꿈'에 내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출연한 최은희씨.

1978년에 들어서자마자 영화배우 최은희씨 실종 사건이 도하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홍콩 영화사 초청으로 영화 촬영 협의차 홍콩에 머물고 있던 최씨가 실종됐다는 것이다. 평소 영화 촬영과 연극 공연 때마다 책임지고 의상을 만들어준 그녀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나는 한동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은희씨와의 첫 만남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지에서였다. 내가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작은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불쑥 찾아와 옷을 주문했다. 당시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매력적인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서울 환도 후 퇴계로에 정식 부티크를 열고 연극단체인 신협 소속이던 김동원씨의 의상을 맡게 되면서 이 극단 주연 배우였던 최씨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연극 의상을 만들어주다가 영화 의상까지 내가 맡았다.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연극 의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줄리엣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해 눈물 없이는 못 볼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때 줄리엣 역을 열연한 최씨가 입었던 의상은 살갗이 비치는 흰색 원단을 바이어스 컷으로 재단해 물결이 흐르듯 몸에 감기도록 디자인했다. 줄리엣의 비련미를 더욱 살려주었던 드레스였다.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영화 의상 중 50년대 말, 현대판 '춘희'의 의상이 가장 고급스럽고 멋졌다고 생각한다. 흰색 개버딘과 벨벳으로 앞판을 조끼 모양으로 강조, 드라마틱하게 연출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최씨는 당시 키 165㎝, 가슴 36인치, 허리 25인치, 히프 36인치로 완벽에 가까운 몸매였다. 무대나 스크린의 첫 장면에 등장하면 순간적으로 관객의 호흡을 멈추게 하는 카리스마가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세기에 한 명 정도 나올까 말까 하는 스타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마지막 의상은 2001년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신협의 재기를 위해 기획했던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 역 의상이다.

70대 중반이던 그녀가 젊은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그 열정과 용기에 감동했다.

항간에는 김일성이 영화 '사랑방 손님'에서 최씨의 청초한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녀와 신 감독을 납치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끊임없이 영화에 열정을 쏟아온 신 감독을 뒷받침하며 살아온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직도 감격하고 있다. 그녀가 한국 영화사에 남긴 업적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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