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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제5부 (1)우뚝 선 고려신사에 망명의 한 "꿈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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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본사가 후원하는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학술조사단이 일본의 심장부인 관동지방일대 현지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 조사는 일본전역에 흩어져 있는 우리문화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재정리하기 위해 마련한 5개년 종합학술조사작업의 마지막 5차연도 사업이다.
학술조사는 이미 86년 구주지방에서 출발해 사국·중국지방(8가카, 근기 남부지방(88년), 근기북부·동해연안지역(89년)까지 조사를 마치고 매년 본지에 연재돼 왔다.
이번 조사에는 김사엽 전소장, 홍윤직 동국대교수, 단희린씨(재일사학자), 김태준 동국대교수등이 참가했다.
조사결과 보고서를 독점게재한다. 【편집자주】
마지막 조사대상 지역은 일본의 수도인 동경을 에워싸고 있는 관동지방이다. 이곳은 근기지방(오사카주변)에 비해 한반도와의 연관성이 적은 곳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현지답사해보니 우리 조상들의 발길과 입김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이 지역은 에도(강호)시대 당시 반토(판동)지방으로 불렸으며 8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리적으로 볼때 서북부쪽은 높은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고, 동남쪽은 태평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평야지대다.
6세기말 대륙문화가 전래되면서 아스카(비조)문화가 꽃피었던 때만 해도 이곳은 잡초가 우거진 미개척의 변방이었다. 당시의 중심은 야마토(대화)조정이 자리잡은 근기지방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고구러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룬 시기에 해당한다. 이같은 한반도 정세가 고대 한일관계의 큰 계기가 된다.
일본은 백제와 오랜 형제관계에 있었으므로 백제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군사를 보내 지원했드나 백촌강 전투에서 참패하고만다. 그뒤 야마토조정은 백제재건 운동까지 벌이나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며 고구려마저 멸망한다. 이에 일본은 전쟁난민·망명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야마토조정은 이들을 변방인 관동지역으로 보내정착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713년에는 사이타마(기옥)지역에 고려군이 설치돼 각처에 분산돼 있던 유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약2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고려사·고려신사가 남아있는데 당시 고구려유민의 인솔책임자인 왕손고려 야광의 영혼을 모시고 있다.
한편 신라로부터의 이주민들도 하나의 마을을 형성, 특별거주지로 삼았다. 『속일본기』는 「758년 신라에서 건너온 승려 32인·여승 2인·남자 19인·여자 21인등을 무사시(현재 사이타마지역)의 한지로 보내 처음으로 신라군을 둔다」고 전한다.
고구려·신라 난민들은 관동지방의 황무지를 개척해 논밭을 일궈 농작물을 재배해 나갔다.
이와 함께 삼을 심고 양잠을 일삼아 직물업이 크게 발달했다. 삼은 원래 열대성 식물로 동남아시아 방면이 원산지인데 적도 북해류(흑조)에 의해 극동지역에 들어온 문화적 요소다. 그들은 이생산기술로 의류 발달을 촉진시켜 나간 것이다. 그 흔적은 관동지방 지명에 반영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에 「고구려」란 말을 많이 붙여 사용했다. 한자로 고구려를 「고마」라고도 해서 이 발음을 구(고마)자로 표기하며 구목(고미키→고려내)·구교·구야등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고려본향·고려천은 그대로 표기한 예며 한자로 구자도 많이 보인다.
일본의 고대가요집인 만엽집은 7, 8세기께 가요 4천5백여수를 모은 책으로 일본고대문학의 상징이다. 시와 노래를 표기함에 있어 아직 고유문자가 없어서 우리 신라의 노래 향가처럼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해 표기했다.
만엽집에 쓰인 표기법을 만엽가명(만요가나)이라 부른다. 만엽집은 이처럼 우리신나의 표기법을 도습한 것으로 노래 형식 또한 우리의 가사체 향가체를 이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만엽집은 우리 향가집의 재판인 셈이다.
만엽집은 노래 4천5백수를 20권으로 엮어 놓았다. 이중에 l4권을 「동가」라 하여 2백30수가 수록되어 있다. 동가란 뜻은 근기지방의 동부, 즉 관동지방의 노래라는 뜻이다. 이 지방 농민들의 민요로 노래에 나오는 말과 문법이 다른 지방에 비해 좀 거칠고 조야한 감이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고 박력과 정감이 넘치는 노래들이다. 불린 곳은 관동지방 전역에 걸쳐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동가라고 한자로 표기해놓고 「아두마」노래라고 읽는 점이다. 동자를 「아두마」로 읽는 까닭을 일인학자들은 모르고 있다. 아두마를 만엽가명으로 「오처」라 표기하고 그저 「궁벽한 시골」이란 뜻이라고 풀이하면서 말뜻의 근원은 모른다. 그런데 이말은 우리말 「두메」다. 「아」는 발음 하기 쉽게 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이 아두마노래를 보면 옛날 이 고장에 와 피땀을 흘리면서 개척해 나가는 과정의 고락과 사랑, 꿈이 아로새겨져 있다. 노래의 소재도 농민생활을 담은 것이므로 삼·양잠·신극·방아·연정등을 노래한 것들이 더욱 애절하고 절실하다. 다음에 그중 몇수를 번역해 소개한다.
○다마가와 강가에 바래는, 손수짠 천처럼 살랑살랑, 어이이리 이아가는 귀여운고(의류를 노래한 것)
○삼모시를 광주리에 가득 잣아도, 내일엔 입힐수 없을테니, 자아 불러주오 침실로(삼의 노래 )
고구려가 망하기 7년전인 66l년에 고구려 망명객을 집합시켜 그믈을 통솔하여 수장이 된 고려약광은 외교관으로서 도일하였고 그의 후손은 지금도 이어 59대를 맞고 있다. 그를 모신 고려신사를 찾아갔다. 신사 입구에 장승이 서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이끈 망명객들이 오늘날의 관동지역을 개척하였고, 그들의 울부짖음이 동가로 가요집에 남아있으니, 이 노래와 약광을 모신 신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한없는 감회와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 사 엽

<전동국대 일본학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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