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공무원에 약하더라(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책을 사지 않으면 무슨 후환이 생길지 몰라 어쩔 수 없이 구입했습니다.』
『세무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탁한 책들을 부득이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29일 오전 11시 서울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세무공무원을 사칭,기업체에 세무관련서적을 강매해온 강선문씨(32·인천시 용현동)일당을 조사하던 형사들은 이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들의 진술에 어의없다는 표정이었다.
『담당세무서 법인세과장이라며 전화가 걸려오더니 「요즘 사업이 잘 되느냐」며 몇마디 묻다가 은퇴한 세무공무원들이 책을 편찬했으니 꼭 좀 사달라고 부탁해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강씨등은 지난해 2월부터 서울 마포에 사무실을 차린 뒤 「세정자문협의회」라는 간판까지 번듯하게 달아놓고 「국세법판례총람」등 출처불명의 조잡한 내용의 책을 세트당 10만∼30만원씩 받고 팔아왔다.
이들은 기업들이 세무공무원들에게 약하다는 점을 이용,회사중역들에게 점잖게 전화를 걸어 「담당직원도 바뀌고 했으니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해 달라」고 운을 뗀 뒤 2∼3시간 후 돈을 수금해 가는 「당일치기수법」으로 사기행각을 펼쳐왔다.
이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중에는 K여행사·D선박·H음료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도 많이 있었다.
『요즘 회사들은 탈세를 많이 해서인지 몰라도 세무서직원이라고 하면 꾸뻑 죽고 들어가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책배달업무를 맡았다가 구속된 임모씨(23)는 너무 쉽게 책을 사줘 진짜 세무서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고 했다.
『지능적인 수법으로 책을 팔아온 범인들도 문제지만 이들에게 아무런 확인도 없이 덥석덥석 책을 사준 기업들도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담당형사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이 희극과도 같은 사건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홍병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