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돈쓰고 봉사하고 욕먹기 일쑤 자리 한인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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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5백만명이나 되는 해외교포가 사는 곳마다 크고 작은 교민회가 형성돼있고 한인들간의 응집력을 북돋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민회장들이 있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교민회장이라는 자리가 「교민사회의 대표」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자기돈 쓰고 욕먹는 자리」 쯤으로 외면당하기 일쑤다. 최근 개최된 한민족체전을 계기로 고국에 온 해외교민회장·관련자들의 좌담과 1세 교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 현지 취재를 통해 교민회장의 명암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한인회장은 그야말로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도 대단히 바쁜 위치」 로 설명되고 있고, 미국 정치마당에서 한인유권자가 뒤에 있는 한 정계의 대접도 소홀하지 않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한인회나 한인회장에 어떤 보장된 행정권이 없고, 또 고정된 수입원도 없기 때문에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한인이 몇백, 몇천명밖에 안되는 지역에서는 그자리를 놓고 「내돈 내놓고 봉사하고 욕바가지를 뒤집어 쓰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해 일반적으로 뜻있는 사람들이 윤번제로 임기 1년을 채우는 방식으로 한인회를 운영한다.
또 친목단체 형태의 한인회이기 때문에 회장자리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한인사회가 대규모로 발전한 곳에서는 양태를 달리한다.
60, 70년대 소규모 한인사회를 거쳐 오늘날 크게 성장한 미국 대도시들의 경우는 한인회장 자리가 갖는 비중이 교민숫자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로 변화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교포인구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도시의 한인회장은 친목단체의 장이 아닌 수만명의 한인유권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민 초기만해도 소수가 모여 어떤 때는 한사람이 몇차례씩 회장을 했고 때로는 윤번제로 사이좋게 회장을 돌아가며 했지만 이젠 수십만달러의 선거자금을 동원하는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는 자리로 변모한 것이다.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한인회장 한번 하자고 털어넣는 상황에, 봉급 없고 권력이 보장된 것도 아닌 그자리, 회장이 돼도 자기돈 쓰며 일해야 하는 그 자리를 놓고 불꽃튀는 선거전이 펼쳐진다. 「공약」이 있고 「전략」이 었고 「기호」도 있을뿐 아니라 「포스터」 「현수막」 「전단」「어깨띠」도, 「향응」 「봉투」는 물론 첨단기재인 컴퓨터·무전기도 동원된다.
몇개월전 치러졌던 실제 선거상황을 한번 보자.
6월16일 제20대 시카고 한인회장 선거-.
19대 회장인 변효현씨와 진학수씨가 맞붙었으며 총6천5백11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16, 17대 회장을 경선으로 뽑은후 6년만에 치러지는 선거이기 때문에 교민들의 관심이 지대했고 또 그만큼 선거전도 치열했다.
직접선거에 대한 매력이 한국에 강한 뿌리를 둔 시카고 교민들에게 크게 어필했고 또 미국 참정권이 없는 영주권자의 경우 참으로 오랜만에 맞는 선거여서 감개무량했다.
한인회장이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한인회관이 어디에 있는지 그동안 관심조차 두지않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유권자」 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줄을 이었다.
「한국식 선거의 재현.」 한인회비 10달러를 낸 사람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양 후보가 2만명에 가까운 등록자들의 회비를 대신 납부해주었고 재력이 넉넉했던 모 후보는 수십만달러를 식사비등 선거비용으로 썼다는 말이 흘러왔다.
한인회장에 나서는 후보들의 공약은 많지만 잘라 말하면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 는 것이다.
시카고에서 한인회장으로 2년 임기를 대과 없이 마치려면 적어도 연간 10만달러씩 20만달러는 써야한다.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회비는 기대할수 없고 이사들이 내는 이사회비와 시민권신청 업무대행등 각종 사업을 통한 수익금, 시정부·주정부·연방정부에서 끌어대는 기금등 몇만달러를 제외하먼 나머지는 모두 회장 호주머니에서 염출해야한다.
한인회관 유지비등 잡비와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인건비등 연간 적어도 10만달러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재력이 없으면 엄두도 내지못할 자리다.
내돈, 내시간 뺏기며 봉사한다는데 「한인회 서비스가 엉망」 이라고 교민들이 비판할때는 울화가 치밀다 못해 울고 싶은 심정이 되는 자리가 또 한인회장이다.
경비좀 아껴쓰려고 군소모임에서 식사비를 안내면 『회장 거저 하려한다』 는 욕을 듣는다.
한인회장 자리의 손익계산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게 많다는 계산이 쉽게 나온다.
얻는 것은 교민사회 대표라는 명함에 한국에 나가서의 예우, 미국정치권이 베푸는 행사장 상석자리, 한국고관들의 방미때 악수하는 정도.
교포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시청·주정부등에 진언하고 또 교포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일에서부터 1세들의 향수를 어루만져 주는 「한국의 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치는 일, 자라나는 2세들에게 한국 문화를 전승시키고 1세들이 못다한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할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해주는 일까지 이역땅에서 참으로 뜻깊은 과업을 실행한다는 것이 한인회장이 봉사의 대가로 받는 자긍심이라고 할수 있다.
【시카고=이찬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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