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론서 맴도는 「미래구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1세기는 단순한 직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21세기를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예컨대 내년부터의 7차 5개년계획이 끝나는 오는 96년에 가서 다시 97년부터 2001년까지의 8차계획을 짜본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제와서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를 동일한 운동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직선적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업혁명이후의 20세기가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에 따른 전혀 새로운 좌표축 위에 놓여졌듯이 21세기를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앞으로의 세계사가 전개될 새로운 좌표축이 무엇일까를 짚어보고 그 위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시간대 구분 무의미>
그런 뜻에서 21세기 또는 그세기의 어느 특정 연도라는 인위적인 시간대의 구분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을 정보사회로 규정짓든, 아니면 후기 산업사회로 명명하든 21세기는 한국사나 세계사나 새로운 양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대명사다.
그런 미래에 대한 준비가 현재의 우리에겐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난 85년 한국개발연구원이 「2000년을 향한 국가 장기 발전구상」 을 펴냈고, 89년에 조직된 21세기위원회가 2020년을 의제설정 목표연도로 하여 연구를 진행중이지만, 이를테면 연장·확대된 5개년 계획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뿐 본격적인 미래구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한국미래학회 (회장 최정호 연세대교수), 한국미래연구학회(회장 전득주 숭실대교수), 미래구상연구회 (회장 공성진 한양대교수)등 3개 민간연구단체가 1∼2년전부터 비로소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으나 아직껏 주목할만한 결과는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민·관을 통틀어 그나마 미래를 지향한다고 하는 연구기관·단체가 고작 이정도니 국내 학술·출판분야에서의 미래지향적 토양은 척박할 수밖에 없고, 당장의 실리를 좇아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정치집단의 비전은 거론할 필요성조차 없다.
최근까지 21세기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도 비록 의제설정 목표연도가 2020년으로 한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미래지향」 의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그 보기로 본격적인 정보사회가 올 것이니 정보산업의 발전과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가 앞으로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하는 식의 서술은 일직선적인 단순 발전전략이다.
또 문화에 대한 욕구가 점증할 것이니 향후 「문화적 차원의 국가 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현재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분야에의 투자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식의 일상적 논의와 크게 다를바 없다.

<단순발전 전략 탈피>
미래를 향한 구상이라면 본격적인 정보사회가 닥쳤을 때 우리의 산업조직과 소비행태·교육양식등이 어떻게 재구성될 것이며 또 대외교역의 형태나 새로운 세계교역 질서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등에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또 단순히 문화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높여야 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사회에서의 예술의 양식이나 문화적 욕구·갈등이 어떠한 형태로 표출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앞서야한다.
「대기업의 과감한 자기혁신 단행」 이나 「참신한 노사정책의 전개」 와 같은 주요 실천과제만해도 그렇다.
이같은 과제는 현실의 반성에서부터 출발한 대응논리일 수는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 발전·변형되어 나갈때, 예컨대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조직이 더 효율적인지 대기업 위주의 계열화가 더 능률적인지에 대한 우리나름의 근본적인 논의가 없이는 미래에의 구상은 어렵다.
더구나 「세제 집행과정의 공정성 확보」 와 같은 실천과제는 20세기든 21세기든 늘상 해야할 정부의 책무이지 미래를 향한 발전전략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앞으로 국가경제 활동에서 정부재정의 역할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미래구상에 가깝다.
위와 같은 몇가지 보기는 어떤 특정한 기관이나 단체의 연구결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학계·정부·정당등 굳이 어느 특정분야라 할 것없이 오늘의 갈등해소도 중요하고 당장의 비합리를 합리로 바꾸어 놓는 것도 시급하지만, 그럴수록 미래로 눈을 돌리고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것일까 하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몸에 배게 하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여기서 미국이 지난 77년 카터대통령의 요청으로 「지구 2000년」 이라는 연구를 3년에 걸쳐 진행, 그 보고서를 전세계에 보급했고, 일본의 서점에는 지금도 때로는 허황되기까지한 미래를 예측한 책들이 수없이 꽂혀 있으며, 드러커 교수나 토플러박사등 대표적인 미래학자들이 얼마나 왕성하게 연구활동을 계속해 왔는지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다.
대신 다음과 같은 한 평범한 미국인 교수의 삶의 양태와 사고의 한 단면을 보자.
조지·달비(Jeorge E Darby)씨는 하와이대학 경영학과 교수이며 법률자문 회사에도 관계하고 있다. 또 하이 테크놀로지 연구를 위해 태평양 국제연구소에서 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미·일선 연구활발>
그는 몇년전부터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독학했다. 또 그때부터 1년에 한두달씩 휴가때면 매년 거르지 않고 일본의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다닌다.
지난 6월3일에도 그는 일본 주고쿠 (중국) 지방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 의 고향인 하기 (추) 시를 혼자 여행하고 있었다.
여행길에 우연하 만나 허름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된 한국인 기자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사회든 억압구조를 지속시킬 수는 없다. 또 정보사회는 이미 시작됐다. 일본의 가장 억압받는 계층은 바로 여성이다. 미래의 교역은 지금과 같은 대형무역상 중심이 아니라 컴퓨터 통신으로 연결된 수많은 동시다발적 교역이다.
일본의 여성인력을 텔리워커(Teleworker)로 훈련시켜 활용할 경우 미국이 일본에 통상압력을 넣을 필요도 없이 일본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수 있다.』
그의 말이 옳은지 틀린지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유명한 미래학자가 아닌 평범한 교수이면서도 살고 생각하는 것이 그만큼 미래지향적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김수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