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석유화학사와 4개 정유사가 하루 간격으로 수백억원씩의 과징금을 맞았다. 일부는 검찰 고발까지 당했다. 유화업계 담합은 11년 묵은 관행이다. 정유사의 기름값 담합도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찾기 어려운 대표적 사안이다. 이 때문에 두 건 모두 강철규 전 위원장이 2004년 조사를 시작하고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3년을 끌어온 '앓던 이'를 단번에 뽑은 건 임기 2년차를 맞은 권 위원장이다.공정위의 최근 행보는 지난해 재벌정책에 '올인(다걸기)'하다시피 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올 들어 표적은 민생 관련 불공정거래 행위로 옮아갔다. 이는 권 위원장의 뜻이라는 게 공정위 핵심 간부들의 전언이다.
권 위원장은 재벌 독과점 규제를 전공한 교수 출신이다. 지난해 3월 공정거래위원장이 되자 권 위원장은 출자총액제한제보다 더 강력한 순환형 출자 금지 방안을 직접 들고 나왔다. 그러나 순환형 출자 금지는 불발에 그쳤고, 그나마 출총제 개편안조차 국회 통과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런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권 위원장은 올 신년사에서 "소비자 복지 증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공정위의 올해 업무계획에도 권 위원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첫 줄에 국민생활과 밀접한 소비재 분야, 기업경쟁력과 직결되는 원자재 분야, 정부 조달 분야를 집중 감시하겠다고 못 박고 있다.
공정위가 재벌 때리기에서 본연의 업무인 소비자 보호와 카르텔 깨기로 돌아선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동안 심증만 있던 기름값 담합을 처음 적발해낸 건 소비자 이익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기업들은 공정위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권 위원장은 연초 "기업의 불법행위는 엄격하게 제재하되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해 과징금 부담은 줄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벌써 공수표가 됐다.
기업들은 공정위의 칼날에 한껏 움츠러드는 분위기다. 모 그룹은 세 차례의 과징금이 1000억원을 넘어설 정도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다른 경제 부처가 그동안 벌인 각종 정책의 입법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자 경제 경찰인 공정위가 나서서 기업의 군기를 잡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정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