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단 얼씨구 좋~다!" 반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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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섯 살이 되던 해 추석 전날,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가 불쑥 나타났죠.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에 끌려 목욕탕에 갔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새 옷으로 갈아입었죠. 옆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울며 애원했구요. 만류하는 어머니를 뒤로한 아버지 손에 끌려 거의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는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인으로 성장한다. 1957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남사당패의 후예가 됐던 김덕수(55.사진)씨다. 그가 예술 인생을 시작한 지 꼭 50년이 됐다. 다음달 12~13일에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연다. '진도씻김굿' 무악의 인간문화재 박병천(74)씨,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인간문화재 안숙선(58)씨 등 정상급 국악인 50여 명이 우정 출연한다.

김씨는 "입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장돌뱅이들의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 장터 한가운데서 열리는 씨름대회의 소란, 그리고 신나는 풍물 가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조치원 난장'의 기억은 이후에도 그의 음악을 붙잡는 힘이 됐다.

김덕수씨가 일곱 살 때 무대에서 장구를 치는 모습.

어릴 적부터 김씨는 장구를 기막히게 다뤄 사당패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일곱 살에는 '전국농악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탔다. '장구 신동'이라는 말이 자연히 따라다녔다.

농악.판굿 등에 흩어져있던 우리의 전통장단을 한 데 모아 무대음악으로 만든 것도 그다. 78년 꽹과리.징.장구.북을 모아 '김덕수 사물놀이패'로 첫선을 보인 사물놀이는 한국 전통음악의 세계화에 큰 몫을 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성공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첫 해외공연인 82년 일본에서는 '박수 이상의 열광'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의 사물놀이패는 한해 180여회, 국내.외 총 4500여회의 공연을 했다. 98년 프랑스 문화부가 예술문화훈장을 수여하는 등 유럽.미국.아시아 각국에서 김씨에 대한 초청이 이어지고 있다. 그와 함께 작업한 미국의 베이스연주자 빌 라스웰은 "김씨의 음악은 민족음악을 뛰어넘은 위대한 음악"이라고 했다. 일본의 야마시타 요스케(피아니스트)는 "멜로디는 음악에 속하지만 리듬은 인간 자체에 속한다는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악가"라고 김씨를 평가했다.

김씨는 "나의 50년은 서민들의 놀거리.볼거리를 위한 '광대' 여정이었다"며 "앞으로 교육과 공연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을 위한 그의 꿈은 세계 모든 음악교실에 꽹과리.징.장구.북을 놓는 것이다. 서민들의 '연희'를 재현하기 위한 공연도 기획 중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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